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역사적이라면 역사적이다. 북한으로서는 20년 만에 소원을 이룬 셈이니까. 그리고 며칠이 지났나. 북한은 느닷없이 한국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막 말을 해대면서 남북관계를 전면 차단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다.
김정일 체제 본색(本色)인가. 망발에, 조폭 수준의 공갈로 들린다. 어쨌거나 그 의도를 놓고 해설이 구구하다. 테러국 해제에서 자신을 얻은 북한이 대남 강공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굴절시키기 위한 예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책략이다 등등.
특히 주목되는 부문은 ‘최고 존엄을 훼손했다’는 표현이다. 한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문제를 제기한 것을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 탈북자 단체들이 날려 보낸 대북 전단에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수령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에, 신성모독죄라도 저지른 양 정색을 하고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탈북자 단체가 김정일을 비난하는 전단을 띄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분명히 말해 두지만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국이다. 민간인을 납치하고 외교관을 암살했다. 리비아와 시리아에 미사일을 팔았다. 세계 유일의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은 여지없는 테러국가다.”
미국의 보수논객 앤느 애플바움의 지적이다. 부시 행정부가 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의 이름을 지웠는지 강한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동시에 그 배경을 추적했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단죄했던 부시다. 그가 어떻게 그런 협상을 하게 됐는지 원인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내려진 결론은 뭔가 실제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올해의 작황이 신통치 않다. 대기근이 임박했다는 징후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 체제에 압박을 가하는 게 과연 현명할까.” “북한은 변하고 있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해도 변화는 이제 대세다.”
한 달 전 이코노미스트지가 내린 관측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고 6자회담 재개에 나설 것으로 보았었다. 대기근 가능성과 김정일 유고, 혹은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물결을 그 주요 이유로 지목했던 것이다.
애플바움도 비슷한 맥락에서 상황을 보았다. “테러국 해제의 실제적 진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정일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혹시 본 것은 아닐까…. 테러국 해제는 사태관측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고.” 이어진 결론이다.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과 관련해 한 가지 공공연한 비밀이 존재한다.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를 원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왜 북한에 보너스를 안겨 주었나. 그 실마리 추적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 체제가 몹시 흔들리고 있다. 김정일의 건강에 분명히 이상이 생겼다.
그의 건강문제도 문제지만 그 체제는 현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 극도의 피로증세와 함께 임계점이 이른 것 같다. 그 체제에 압력을 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후의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
핵은 무엇을 위해 개발되고 있나. 북한 주민의 생존을 위해서도, 북한이란 국가 수호를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수령 결사옹위를 위해서다. 수령절대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서다. 핵은 그러므로 바로 체제다. 그 핵을 김정일 체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이 제기된다. “수령이 사라진다면…”이다. 수령체제도 사라진다. 핵에 대한 입장도 달라질 수 있다. 수호해야 할 수령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토대로 상상은 비약한다. 사망까지는 몰라도 돌이킬 수 없는 유고사태임은 분명하다. 후계자 확보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수령절대주의 체제는 시간에 쫓기고 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행방은 아직 불투명하다. 그렇지만 확실한 시그널을 보낼 필요가 있다. 친화적 제스처다. 자칫 파국적 상황도 올 수 있으니까.
왜 대북전단에 그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인가. 수령의 신상에 중대 이상이 생긴 것만은 확실하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공격적 몸부림이 대남 협박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소문은 북한 내부에도 파다하다. 동요가 일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최근 들어 공개 총살형이 잇달고 있다는 탈북자들의 전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는 벌써 시작됐다. 그 김정일 이후 한반도 미래를 둘러싸고 이해 당사국들은 소리 없는 각축전에 돌입했고…. 일련의 사태를 종합하면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아닐까. 6자회담은 북한 핵이 아닌 ‘김정일 이후 북한문제 해결 국제회의장’으로 변하고.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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