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깨어난 오티스 7회말 3점홈런
드루, 8회말 2점홈런 9회말 결승타
막판 집중포에 레이스 승리 물거품.
챔피언은 맥없는 하산을 거부했다.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꽥 소리를 내려 했고 내야 했고 결국 냈다. 디펜딩 월드시리즈 챔피언 보스턴 레드삭스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레드삭스는 16일 밤 홈구장 펜웨이 팍에서 열린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7전4선승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ALCS) 5차전에서 7회초까지 0대7로 뒤지다 7회말부터 갑자기 살아나 융탄폭격 추격전을 벌인 끝에 8대7로 역전승을 거뒀다.
1차전 승리 뒤 3연패를 당했던 레드삭스는 한번만 더 지면 끝장인 5차전을 화끈한 역전승으로 장식하며 2승3패가 됐다. 레드삭스가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7점차 열세를 뒤엎고 승리한 것은 팀 창단 이래 처음이다. 어느 팀이냐를 막론하고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7점차 열세극복 역전승은 1929년 월드시리즈 4차전 이후 79년만에 처음이다. 당시 필라델피아 A’s(현 오클랜드 A’s)는 6회까지 0대8로 뒤졌으나 7회에 무려 10점을 뽑아내며 10대8로 승리했다.
창단 이래 최초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등극과 월드시리즈 진출을 코앞에 두고 쓰라린 역전패를 당한 탬파베이 레이스와 창단 이래 최대의 포스트시즌 역전쇼를 펼치며 기사회생한 보스턴 레드삭스는 18일 레이스의 홈구장으로 옮겨 ALCS 6차전을 벌인다. 이 경기에서 레이스가 이기면 시리즈는 끝이다. 레드삭스가 또 이기면 두 팀은 같은 장소에서 19일 마지막 승부를 벌인다.
▶1회부터 7회초까지, 참말같은 레이스(Rays)의 일방적 레이스(race) :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레드삭스는 1차전 승리의 주역 다이스케 마쓰자카를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일보만 전진하면 되는 레이스는 또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마쓰자카 공략법을 면밀히 예습했다. 그것은 구질은 다양하나 K존 바깥 유인구가 많은 마쓰자카 피칭의 특성을 간파, 삼진을 먹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좋은 공만 골라친다는 만만디 배팅이었다.
일본 선수끼리 맞붙은 1회초 첫 투타대결, 레이스의 선두타자 아키노리 이와무라의 인내배팅이 마쓰자카의 유인피칭을 이겼다.
풀카운트까지 간 신경전 끝에 우전안타. 마쓰자카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음타자 BJ 업튼도 침착했다. 초구 볼. 속지 않는 업튼에게 마쓰자카는 별수없이 K존으로 공을 뿌렸다. 업튼은 방망이로 응사했다. 빗맛았다. 파울. 평소의 마쓰자카라면 이 대목에서 한번쯤 공을 뺄 타이밍이었다. 마쓰자카는 승부를 택했다. 물러설 업튼이 아니었다. 볼을 예상했는지 업튼의 응사 반응속도는 좀 늦다 싶었다. 그러나 배트의 궤적은 부드럽고 속도는 빨랐다. 튕겨나간 공은 군말없이 드높은 왼쪽담장 위에 꽂힌 뒤 또르르 굴렀다. 2대0.
3회초. 레이스 타자들은 벌써 한순배 돌았다. 선두타자는 다시 이와무라. 이번에는 마쓰자카가 이겼다. 1루쪽 땅볼 아웃. 다시 만난 홈런타자 업튼과의 승부에서는 K존 외곽의 유인구를 던지지 않았다. 업튼도 그냥 당하지 않았다. 초구 파울, 2구 헛스윙. 마쓰자카는 이럴 때 한번쯤 빼는 마쓰자카식 투구패턴 대신 또 정면승부로 나갔다. 레이스 타자들의 기다림 배팅을 역이용한 속전속결 작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업튼이었다. 가볍게 툭 갖다대 중전안타. 그리고 3번타자 카를로스 페냐가 왼쪽타석에 들어섰다. 무표정한 마쓰자카는 무표정한 초구를 던졌다. 패스트볼인지 체인지업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그러나 K존을 벗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읽혀지는 정직한(혹은 순진한) 공이기도 했다.
어지간히 급한 상황에도 잔잔한 미소까지 띠며 (적어도 겉으로는) 늘 여유로운 페냐는 마치 손을 꼽아 기다린 공이었다는 듯 가차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맞는 순간 투수도 타자도 해설자도 구경꾼도 모두들 홈런임을 직감할 수 있는 타구였다. 훨훨 날아 오른쪽 담장 너머 관중 숲으로 사라졌다. 4대0. 다음타자 에반 롱고리아는 맥풀린 마쓰자카의 5구를 통타, 왼쪽 펜스 너머에 꽂히는 왕대포로 연결했다. 5대0.
승리버팀목으로 내세운 마쓰자카는 근근히 4회까지 버틴 뒤 5회초 첫타자 이와무라에게 볼넷을 내주고는 히데키 오카지마로 교체됐다. 반면 레이스 선발투수 스캇 캐즈미어는 고질적인 1회 불안피칭에 이날도 출발이 매끄럽지 않았으나 이닝을 거듭할수록 안정을 되찾으며 6회까지 2안타 3볼넷 7삼진 0실점으로 선방했다. 레이스는 7회초 불붙은 업튼의 2타점 2루타로 2점을 더 보태 7대0까지 달아났다.
▶7회말부터 9회말까지, 거짓말 같은 레드삭스의 역전극 : 2004년 레드삭스는 놀라웠다. ALCS에서 뉴욕 양키스에 3연패 뒤 4연승을 거두고 월드시리즈에 진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이겨 챔피언이 됐다. 2007년 레드삭스도 볼 만했다. ALCS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1승3패로 벼랑 끝에 몰렸다가 3연승을 거둔 뒤 월드시리즈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를 4연승으로 제압, 4년만에 두 번째 왕중왕에 올랐다. 해설자들은 사이사이 양념삼아 이런 얘기를 했다.
빛바랜 추억담 뒤에는 올해 레드삭스가 왜 안되는지 이유들이 굴비처럼 엮여졌다. 작년 포스트시즌에 떴다 하면 승리를 따낸 보증수표 특급에이스 자시 베켓이 부진하고, 고비고비 왕대포를 쏘아올렸던 ‘빅 파피’ 데이빗 오티스가 빈타에 허덕이고 있으며, 오티스와 함께 무적타선을 구축했던 도미니카 출신 홈런쌍포 매니 라미레스가 LA 다저스로 이적해 타선의 중량감이 떨어졌고, 큰 게임에 강한 JD 드루가 제몫을 못해주는가 하면 작년 월드시리즈 MVP 마이크 로웰이 부상으로 아예 빠져 있고…. 또 있다. 2004년 왕중왕 고지정복의 견인차였던 우완특급 커트 실링도 부상치레를 하느라 대기자 명단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그는 이날 5차전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와 시구를 하는 것으로 시름을 달랬다.
아닌 게 아니라 레드삭스 덕아웃은 침묵 덩어리였다. 뒤켠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베켓의 표정이 클로즈업됐다. 입벙긋은 고사하고 거의 눈동자도 움직임이 없었다. 맞은편 레이스 덕아웃은 도무지 그냥 앉아있기도 벅찬지 거개들 서성거리며 활기있게 북적였다. 펜웨이 팍을 꽉 메운 3만8,400여 관중들 틈새에 아주 드물게 박힌 레이스 팬들만 눈치없이 좋아라 난리였다. 레드삭스의 대반격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됐다.
7회말 2사 주자 2루. 캐즈미어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그랜트 밸포어로부터 코코 크리습이 좌전 적시타를 뽑아 1,3루가 되고, 더스틴 페드로이아가 우전적시타를 터뜨려 지지리 안뽑히던 1점이 뽑혔다. 주자는 다시 1,3루. 올해 포스트시즌에 홈런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안타 하나 만드는 데도 하세월이 걸릴 정도였던 오티스가 마침내 이름값을 했다. 오른쪽 담장 너머에 3점홈런. 7대4.
오티스의 방망이가 후다닥 가을잠에서 깨어나자 그 뒤에서 잠자던 JD 드루의 방망이도 부스스 일어나 2점짜리 홈런(8회말)으로 부활을 선포했다. 7대5. 7회말 대추격의 첫단추를 꿰는 적시타를 날렸던 재간둥이 크리습은 8회말 우전적시타로 캇세를 홈으로 불러들이며 기어이 동점을 만들었다. 점수 이전에 분위기부터 역전됐다. 쫓기는 레이스 덕아웃도, 뒤쫓는 레드삭스 덕아웃도, 구경하는 관중석도, 해설하는 중계팀도, 모두들 필드에서의 극적인 사태돌변에 종잡을 수 없는 말들과 표정들을 쏟아냈다.
9회말 2사후. 내야안타로 출루했다 3루수 롱고리아의 악송구로 더 줄달음친 케빈 유클리스가 2루에 있고 고의볼넷을 얻은 제이슨 베이가 1루에 있는 상황에서 ‘조용한 저격수’ 드루가 우익수쪽 깊숙한 곳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유클리스가 홈으로 튀는 동안 레이스 우익수는 타구를 쫓다 말고 포기했다. 대신 레드삭스 덕아웃에서 우르르 빨간 옷 사내들이 떼몰려 필드로 쏟아졌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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