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자(의사)
긴급 구제금융 법안이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빈사 상태로 쓰러진 투자은행들에게 7,000억 달러의 납세자의 혈세로 수혈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팔을 걷어부치고 헌혈로 금융회사들 목숨을 건져준 납세자들에게 돌아오는 댓가는 무엇일까?
나 역시 월스트릿의 거대한 투자은행들이 던진 그물망에 걸린 작은 물고기다. 왜냐하면 나도 리만 브라더스 투자은행에 채권이라는 종이 쪼가리로 뻥 튀김을 하려고 했는데 회사가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모래성처럼 무너진 회사가 남은 부실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제 미국 경제는 정부, 개인 모두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았다. 벼랑 끝에 서있는 미국 경제위기 속에서 빈 손으로 시작했던 나의 이민 초기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미국에 이민 보따리를 풀면서 밥숟갈부터 사야 했고 신문광고를 보고 헌 가구를 사러 다녔다. 어느 날 신문에서 스크랩 한 주소를 들고 찾아간 단층집에 들어서니 겨울 나뭇가지같이 앙상한 노인이 거실 의자에 앉아있다. 노인은 집을 팔고 양로원으로 옮기려는 모양이다. 빛을 잃은 노인의 눈과 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이민자의 새로운 삶의 시작과 나보다 먼저 자리잡은 정착인의 삶의 끝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솜이 천 밖으로 터져나오는 낡은 소파, 나무식탁과 의자 등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우리 집은 아직 이민가방을 풀지 않은 사촌오빠와 나의 동생들의 여러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사는 난민촌 같았다.
그날 밤, 이민의 꿈을 안은 집단 이민자들은 내가 헐값으로 사온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로 불꽃이 튀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촌오빠는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을 베개 속에 가득히 채우고는 밤에는 그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그는 잠자면서도 베개 속의 돈으로 무슨 장사를 시작할까 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다. 베개 속에서 숨쉬고 있던 돈은 이민의 뿌리를 내리는 종자 씨였다.그 때 나는 돈베개를 베고 자는 사촌오빠를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요사이 미국인들이 은행을 믿을 수 없으니 침대 매트리스 밑에 돈을 깔고 자야겠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정부나 개인이 빚으로 꾸려나가고 있다.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Asher Miller)의 퓰리처상 수상 작품인 ‘세일즈맨의 죽음’이 떠오른다. 60이 된 늙은 윌리라는 주인공은 36년간 자동차 외판원으로 일하던 회사에서 일의 경쟁력을 잃게되자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는 단물을 빨아먹은 오렌지 껍질처럼 가차없이 버려진다. 그가 평생 외판원으로 길바닥에 쏟아 부었던 시간들도 한순간에 사라진다.미국은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어두은 터널을 빠져나와 산업화의 전성시대로 접어든다. 인간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대량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는 아들의 꿈인 스포츠용 가게를 마련해 주려고 자동차 과속운전으로 자살을 하고 보험금을 남긴다.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 찾아온 것은 생명과 돈을 바꾸는 정신적 빈곤과 파멸이다.그는 죽기 전, 마지막 남은 집 모기지도 모두 갚았다.
남편의 월급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아내는 혼자 남은 비좁은 방에서 “이제 나는 해방이야”라고 울부짖는다.외판원인 그녀의 남편은 땅속에 묻히고 난 다음에야 평생 빚을 모두 갚았다. 집 모기지, 자동차, 학비, 보험 등을 은행 대출을 받아 꾸려가는 미국 소시민들의 빚쟁이로 살
아가는 할부인생을 고발한 작품이다.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미국 소시민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경제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열심히 저축하고 적게 쓰는 일이다.
이제 투자은행과 개인 사이에 끼어있는 중간 거래인, 펀드 매니저의 잔머리 굴리는 전략도 믿기 힘들다.월스트릿은 한탕주의 도박장으로 타락했고 아메리칸 드림을 헛된 꿈(Phony Dream)으로 변질시켰다.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 독식의 횡포도 사라져야 한다. 월스트릿의 투자가들은 돈을 좇아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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