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이탈리아축구판 누비는 마흔수비수 파올로 말디디
매이저리그 ‘가을의 클래식’ 마운드에 선 제이미 모이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의 최대사건 중 하나는 카메룬의 8강진출이었다. 카메룬이 일으킨 검은 돌풍의 정점에 로저 밀러라는 선수가 있었다. 당시 38세였다. 감독은 몰라도 트레이너로 참가해도 될 성 싶은 그 나이에 그는 공격수로 출전했다. 교체멤버로 뛰며 그는 5게임에서 4골을 기록했다. 그의 월드컵 나들이는 42세인 1994년 미국월드컵까지 이어졌다. 여기서도 그는 골을 기록했다. 공식기록상 42세39일에 기록한 것이었다.
파올로 말디니. 올해 나이 만 40세인 말디니는 이탈리아 프로리그(세리에A) AC밀란의 현역 중앙수비수다. 최근에도 연속 풀게임을 뛴 위풍당당 주전멤버다. 밀러보다는 젊지만 그가 거칠기로 소문난 이탈리아 프로리그의 명문클럽에서, 게다가 수비축구로 유명한 이탈리에서 마흔이 되도록 스타팅멤버 중앙수비수로 뛴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상대팀 공격수들도 말디니가 버티는 AC밀란 진영을 인정사정 볼것없이 파고들다가도 데드볼이 되거나 파울이 나와 상황이 반전되면, 그리고 곁에 말디니가 있거나 먼발치 말디니와 눈이 맞으면, 조금 전까지의 험악한 몸싸움을 싹 잊은 따스하게 웃거나 슬며시 손을 내밀며 경의를 표하곤 한다. 육(肉)과 육이 육의 생존법칙에 따라 가차없이 맞부닥치는 살풍경에 그런 장면들이 인간의 향기를 뿌려주는 방향제 구실을 하는 것 같다.
16세 미소년이던 1984년 AC밀란에 입단해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면서 그는 세리에A 역사상 최다게임 출장기록을 세웠고, 1988년부터 2002년까지 이탈리아대표팀 수비수로 활약했다. 이탈리아는 그가 수비수로 있는 동안 1990년 월드컵 4강, 1994년 월드컵 준우승, 1998년 프랑스월드컵 8강, 2000년 유럽선수권 준우승 등을 차지했다. 그의 월드컵 고별무대였던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16강전에서 한국의 벌떼공격에 당해 안정환의 연장전 골든골로 조기퇴역했다.
그는 작년 12월 AC밀란이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를 꺾고 우승한 뒤 07-08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했으나 08-09시즌에서도 AC밀란 수비의 핵으로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빼어난 미남에다 건장한 체구(186cm/85kg)의 이 사나이가 트레이드 마크다시피 한 치렁치렁 긴 머리를 휘날리며 언제까지 그 거친 승부의 황야를 지킬지 아무도 모른다. 당장 오늘내일 그곳에서 밀려나더라도, 그가 축구로 일군 온갖 영예를 깡그리 무시하더라도, 그 나이가 되도록 그곳에서 버텼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축구역사는 그를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요즘 한창 달아오른 메이저리그 야구 ‘가을의 클래식’에서도 쉰 나이를 바라보는 현역선수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NLCS)에 진출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좌완투수 제이미 모이어(Jamie Moyer)다. 대기요원이 아니다. 당당한 선발요원이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지난 4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서 선발투수로 출격했다.
모이어는 1962년 11월생이다. 펜실베니아주 출신으로 세인트조셉스 칼리지를 마친 뒤 몇 년동안 마이너리그에서 꿈을 키우다 1986년 시카고 컵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마운드에 데뷔했다. 1988년까지 컵스에서 뛴 그는 1989년과 1990년 두해동안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1991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993년부터 3년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활약했다. 1996년에 한동안 보스턴 레드삭스 마운드를 지킨 그는 그해 시즌 도중 시애틀 매리너스로 이적해 2006년 중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옮길 때까지 매리너스와 함께했다. 매리너스를 빼놓고는 이팀저팀 전전한 것에서 보듯 그는 압도적 구위를 투수는 아니다. 특히 데뷔 이후 근 10년동안 여러차례 마이너리그로 강등됐고, 1989년에는 어깨부상으로 장기간 휴업하기도 했다.
그의 야구인생 출세가 느리듯이 그의 공 또한 지지리 느리다. 패스트볼이라야 90마일을 넘는 게 거의 없다. 대충 80마일 중반이면 모이어치고는 꽤 빠르게 던지는 공이다. 팀 웨이크필드(보스턴 레드삭스) 등 본디 느릴 수밖에 없는 너클볼 투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평균구속이 가장 느린 선수가 바로 모이어(평균구속 약 82마일)다. 그런 그가 지금껏 메이저 마운드를 지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느린 공 덕분이다. 보다 정확히는 느리지만 로케이션이 예리하고 타자의 의중을 읽는 능구렁이 눈 덕분이다.
특히 그의 체인지업은 일곱색깔 무지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대충 비슷하고 살짝 다르게 타자들을 미혹하게 한다. 이거다 하고 치면 그게 아닌 공이 많다. 알면서도 속고 속고나서 또 말려든다. 그의 패스트볼도 구속으로만 보면 슬로우볼이란 명칭이 더 어울릴 듯하지만 타자들 입장에선 업수이 여길 수 없는 구질이다. 그가 던지는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을 잘못 건드리면 피글피글 땅볼을 치기 일쑤다. 그의 슬라이더 역시 매리너스 동료였던 절친한 친구 랜디 잔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슬라이더처럼 위압적이지는 않지만 만만하게 보고 방망이를 함부로 휘두르다 헛심을 쓰기 십상이다.
빠른 것이 호령하는 메이저 마운드에서 그가 느린 공으로 살아남는 비결은 제구력과 완급조절이다. 70마일 중반대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를 슬근슬근 던지다 간간이 80마일 중반대 패스트볼을 던지면 타자는 90마일 중반쯤으로 느껴질 정도가 된다. 그가 몸쪽에 바싹 붙여 던지는 느림보 패스트볼에 타자들이 100마일짜리 강속구라도 피하는 듯 흠칫 놀라는 장면은, 지나고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속도는 어찌할 수 없으되 코스는 마음먹은 대로 요리할 수 있는 그의 제구력은 가위 일품이다. 여기다 타자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하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어도 겉보기에 매우 편안하게 피칭하는 것이 모이어의 특장이다.
그렇다고 모이어가 데뷔 시절부터 느린 공을 주무기로 한 허허실실 피칭에 맛을 들인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역시 타자들을 속도로 파워로 압도하는 투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데뷔 초기 어중간한 패스트볼이 먹히지 않으면서, 게다가 선수생명을 앗아갈 뻔한 어깨 부상을 겪으면서, 더 이상 속도와 파워로는 배겨나기 힘들게 된 자신의 처지에 맞게 새로운 생존법을 느린 공을 통해 구현해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모이어의 위대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은퇴할 나이인 38세 때(2001년)에야 20승 투수가 된 모이어는 올해 정규시즌 33게임에 나서 16승7패를 거두는 등 느리지만 중단없는 야구인생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방어율(3.71)은 21년 통산방어율(4.19)보다 훨씬 좋다. NLDS 3차전에서 모이어의 꾐에 걸려들지 않고 결정적 안타를 쳐 브루어스의 체면치레 1승걷이에 큰 몫을 한 빌 홀은 말했다. 제이미 모이어는 그렉 매덕스 같은 선수다. 관중들이 요란해질수록 그의 공은 더 유연해진다. 우리는 인내하려고(성급하게 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꼭 친다기보다는) 걸려보내면 걸어나간다는 식이었다. 그는 피치수가 많은 투수가 아니다. 맞춰 잡는 투수다. 우리는 초반에 잘 기다린 덕분에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다. 모이어는 또 모이어재단을 만들어 느릿느릿 공으로 벌어들인 돈을 불우이웃 돕기에 쉴새없이 쏟아붓고 있다. 자기관리의 모범생 모이어가 성적과 관계없이 팬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또다른 이유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