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니 곰스(Jonny Gomes). 올해 메이저리그 야구판에 거대돌풍을 일으킨 탬파베이 레이스(아메리칸리그 이스트 디비전 1위로 포스트시즌 진출)의 ‘비정규직’ 지명대타 요원이다. 확실한 거포나 타점가이가 아니어서 직접 뛰는 경우보다 덕아웃의 응원자 신세일 때가 더 많았다. 올해 정규시즌에서 그는 77게임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타석에 선 것은 154차례다. 경기당 2차례다. 그나마 선발출장이 적었다는 뜻이다.
홈런 8개를 포함해 28안타를 그쳐 타율은 1할8푼2리밖에 안된다. 15차레 볼넷으로 걸어나갔고, 21타점을 올렸으며 홈플레이를 밟은 것도 몇 안된다(23득점). 삼진은 안타의 2배 가까운 46차례나 먹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가 올해 연봉(127만5,000달러)만큼 성적을 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우투우타에 적당한 체격(키 6피트1인치/ 몸무게 225파운드)의 곰스는 메이저리그 야구판에서 드물게 보는 샌프란시스코 태생이다. 1980년 11월22일생으로 메이저리그 경력은 5년이 됐다. 내가 곰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이유는 그가 샌프란시스코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그의 이름 때문에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워낙 출장이 뜸한 선수라 중계 때 깜박 그의 이름을 놓친 뒤 기록지를 보고 Gomes를 Gomez로 혼동한 것인지 어림직작으로 그런 것인지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고메스’라고 표기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중계캐스터와 해설위원이 ‘곰스’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이름 표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따로 다룰 생각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배포하는 선수 프로필에서 이름을 발음하는 요령을 따로 붙여놓은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중계팀이라고 꼭 맞는 것도 아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경우가 제법 흔하다.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부정확한 이름표기의 책임이 덜어지는 건 전혀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께 뒤늦게나마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좌간, 곰스는 유명스타가 아니다. 저 멀리 탬파베이 레이스 소속이라 북가주 시청권 야구중계에 등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 위에 언급한 곰스의 이름표기 실수도 시즌 도중 레이스가 베이지역에 원정경기를 왔을 때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그런 선수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곰스 얘기를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니다. 엊그제 레이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서 언뜻 TV중계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에서 받은 인상 때문이다.
타율이 팀내 24위에 불과할 정도인지라 정규시즌에서도 출장기회가 적었고 그나마 대체로 단역(후보선수)에 그쳤던 그는 이번 디비전 시리즈에서 주전은 고사하고 후보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응원단 신세다. 그런데 표정이 엄청 밝았다. 저 혼자 밝은 정도가 아니었다. 팀동료들이 타점을 올리는 등 좋은 플레이를 펼치면 마치 제 일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보기에 퍽 좋았다. 특히 5회말, 아키노리 이와무라가 2점짜리 역전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들어섰을 때 모두들 떼몰려 하이파이브에 포옹에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진 다음에도, 곰스는 수건을 펼쳐들고 이와무라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등 동료애 가득한 장난끼를 보여줬다.
▶비단 곰스뿐 아니다. 자신이 뛰든 못 뛰든, 덕아웃이나 클럽하우스에서 팀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선수들은 그밖에도 많다. 오클랜드 A’s에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거쳐 지금은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뛰는 수퍼스타 유격수 미겔 테하다도 그랬다. A’s 시절 덕아웃 분위기는 거의 테하다가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료들이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덧아웃을 왔다갔다 하며 응원단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느 경기에선가 결정적 고비에 후배들이 연속안타를 치고 점수를 올려나가자 덕아웃에서 자신의 타격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른 후배선수들과 함께 일렬로 앉아 기차놀이를 하면서 맨 앞에서 기관사 흉내를 내던 장면이 지금도 새롭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는 노장듀오 오마 비스켈(유격수)과 데이브 로버츠(외야수)의 장외 분위기 메이킹이 인상적이다. ‘노장이지만 주전’으로 뛴 비스켈도 ‘노장이라서 후보’로 뛴 로버츠도 막내동생이나 조카뻘 선수들이 수두룩한 덕아웃에서 거의 언제나 장난꾸러기처럼 분위기를 돋우는 것 같다, 적어도 TV화면상으로는. 잘한 후배에게는 익살스런 표정과 제스처로 칭찬을 해주고, 실수한 후배에게는 일부러 다가가 토닥거려주거나 뭔가 귀엣말을 해주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중계된다. 이들은 필드에서 뛸 때도, 잘하고 못하고 여부를 떠나, 여유와 즐김의 자세가 엿보인다. 아마도 그런 자세가 상식적인 은퇴적령기를 지나서까지 이들이 승부의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뒷심 아닐까.
▶종목이나 무대는 다르지만 박찬호(미국야구/LA 다저스)도 박지성(잉글랜드축구/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그랬으면 좋겠다. 최근 프랑스 프로축구 AS 모나코로 간 박주영도 마찬가지다. 화면에 비치는 이들의 표정이 너무들 무겁다. 무겁다 못해 너무나 심각하다. 어떨 때는 비장해 보이고 또 어떨 때는 뭔가 불만스런 표정이다. 순전히 TV에 비친 찰나의 표정에서 잘못 넘겨짚은 것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을 전하는 한국언론 기사들-아전인수 왜곡과장 부분을 최대한 덜어내고 읽더라도-을 훑어보면 이런 짐작이 영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지난 5월21일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전후해 박지성 엔트리 제외파동 때도 지적했지만, 스포츠는 스포츠다. 하는 선수들도 보는 팬들도 즐거움이 우선이다. 선수들이 지나치게 국가와 민족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몸도 마음도 긴장한다. 집중하되 긴장하지 말아야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다. 단순한 구경꾼(관중)이나 해설하는 구경꾼(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스포츠에, 특히 코리안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 거창한 것을 부과하지 말아야 순간순간 장면장면 스포츠답게 즐길 수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이들 ‘3박’은, 안타든 볼넷이든 수비실수든 실점을 하는 등 홍역을 치르고도 별다른 동요없이 차분하게 임하는 백차승(샌디에고 파드레스)이나,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서 뛰지만 즐기는 자세가 몸에 밴 듯한 차두리(TuS코블렌츠)로부터 배울 게 있지 않을까 싶다.
LA 다저스가 시카고 컵스에 3연승을 거두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권을 따내는 동안 한번도 부름을 받지 못한 박찬호를 두고, 초반 두어게임 부진을 씻고 08-09시즌 승리쌓기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의 비중을 두고, AS 모나코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몇게임째 골침묵을 보이는 박주영을 두고, 한국언론을 통해 희한한 비약과 아전인수식 엉터리 영어해석 등 온갖 양념을 섞어 하나마나한 소리들이 기사로 포장돼 쏟아지고 있기에 해본 얘기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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