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250만 명이 바람과 물을 피하여 가산을 버리고 도망갔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 텍사스 주에서 태풍 아이크가 빚어낸 사실이다. 대도시 휴스턴을 짓이겼기 때문에 피해가 더 심했다. 전기 없고 냉장고 없고 잠자리는 딱딱하고 식수난에 물론 샤워는 생각도 못하고 음식들은 이미 부패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태부족이어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학교교육은 중단되고 병이라도 돌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이런 사태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서 우리와 같은 미국시민들이 겪고 있는 대환난이다. 한인 동포 사회도 종교 언론매체 사회단체 개인을 막론하고 따뜻한 손을 펴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때이다.
‘선한 사마리아인’(A Good Samaritan)은 예수의 비유이다. 산길에서 강도를 만나 수탈당하고 매 맞아 죽게 된 사람이 쓰러져있다. 그 길을 두 종류의 사람이 지나간다. 하나는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 다른 한 명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레위인’이다. 그들은 모두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 갔다. 그 후에 사회적으로 멸시 받는 낮은 계층이고 이방인(異邦人) 곧 하나님을 모르는 자인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의 시간과 재물을 다 털어 버려진 사람을 도와주었다. “이 셋 중에 누가 이웃이겠느냐?”하는 것이 예수의 질문이었다.
공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으로서는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과 종교 권위자들을 깔아 뭉개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천민의 손을 들어준 이 이야기는 정치와 종교 권위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과감하게 입에 담은 예수
의 의도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직위(권위)와 말에 있지 않고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천명하신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미 태평양 함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353대의 일본 항공기의 급습을 받아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21척의 군함, 177개의 항공기, 2,403명의 군인이 바다 속에 침몰하고 960명의 실종자를 냈다.
태평양에 미군 레이더 기지가 있었지만 마침 일요일이어서 소수만이 남아있고 장교는 중위 한 사람뿐이었는데 많은 이상한 점들이 레이더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도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군일 거다.”고 묵살하였다. 그의 관심은 그 날 저녁에 있을 파티 준비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다. 관심이 없으면 잊기도 잘 하고 일도 성의 있게 못한다. 실
상 덕(德)이라는 것도 관심의 문제이다. 효도는 부모에 대한 관심이고, 신앙은 신에 대한 관심이며, 충성은 관심의 농도를 말하는 것이고, 사랑도 상대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관심이 없으면 진짜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게 된다. 부부의 갈등, 가정교육 등 모든 인간관
계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무엇이나 내놓아 보라. 결국 관심의 문제에 귀착하는 것이다.
오크라호마 시티에서 한 임산부가 거리에서 급하게 아기를 분만하였는데 20분 동안이나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뉴욕 브롱스에서 젊은 여인이 칼로 찔리는 것을 아파트 창문에서 세 집이 목격했지만 손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무관심의 사례가 너무 많아져서 시카
고의 일간지 ‘선 타임스’는 자료파일 목록에 ‘무관심’(Apathy)이란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21개의 문명 중 19개는 외부의 정복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로 소리 없이 붕괴되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문명도 최대의 적은 핵무기가 아니라 무
관심이라고 일컫는 병이다.
최근 한 구호단체가 11세 소녀의 편지를 공개하였다. 이 아이는 몇 해 동안 모은 저축 $100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다. “나는 보통 아이들보다 살이 찐 편입니다. 살찐 나를 볼 때마다 가끔 신문에 나오는 야위고 눈이 움푹 들어간 가난한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이 소녀의 양
심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다. 윤리학에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s)란 말이 나온다. 1841년 미국 기선이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한 척의 보트에 기어올랐는데 인원이 너무 많아 선장인 홈즈 씨가 그 중 몇 명을 파도 속으로 밀어냈다. 대법원은 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지만 존 테일러 대통령의 특사로 형은 치르지 않았다. 이 때 논쟁에서 ‘구명보트 윤리’라는 말이 나왔다. 일부가 살기 위하여 일부는 희생시켜도 좋다는 논리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살아야 하느냐, 힘센 사람이냐, 돈 많은 사람이 살아남을 자격자냐? 이 논쟁은 따지고 들면 굉장히 복잡해진다. 그래서 생명의 문제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이론 전개보다 우선 도와주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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