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보수파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열심히 기도를 했다. 마지막 날 버락 오바마가 옥외연설을 할 때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였다고 하던가.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날 허리케인 구스타프가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그러자 반(反)부시 영화제작으로 유명한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야말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다.”
마니아로 불릴 정도로 열광적인 오바마 팬들은 전당대회 내내 눈에 띄는 배지를 달고 다녔다. In God We Trust의 ‘God’ 자리에 ‘Obama’를 집어넣은 문구가 든 배지를 단 것이다. 이 배지 착용에 특히 누구보다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분개해 했다고 한다.
민주·공화 양당 전당대회와 관련해 전해지는 에피소드다. 가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본선으로 접어든 미국의 대선이 어떤 양상을 보일지, 그 방향을 말해주는 것 같다.
경제가 어렵다. 미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선거 이슈는 때문에 온통 경제에, 안보와 외교문제가 지배하고 있다. 거기에 해묵은 아젠다가 껴들었다. 가치관 논쟁이다. 대선의 흐름이 뒤틀리면서 ‘문화전쟁’(culture war)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잠재성의 아젠다다. 문화전쟁은 언제든지 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현상은 ‘새라 페일린’이라는 무명이었던 한 여성의 이름이 전면으로 부각되면서 새삼 불거지고 있다.
조크도 이런 조크가 있을 수 있을까. 다섯 아이의 엄마다. 그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한 눈에 촌스럽다. 미인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고, 패스포드조차 없다고 한다. 그런 젊은 여자를 부통령 후보로 선정하다니.
미 전국의 뉴스 룸은 조소로 가득 찼다고 한다. 게다가 17세난 딸은 임신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재난에 가까운 선택이다. 존 매케인의 러닝메이트 선정과 관련해 대부분의 주류언론들이 내린 논고다.
이 다섯 아이의 엄마가 그런데 선거의 흐름을 하루 사이에 바꾸었다. 처음으로 서는 전국적 무대다. 3,700여만명이 시청했다고 하던가. 그 가운데 페일린은 천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내보였다. 스스로를 ‘하키 맘’이라고 밝히면서.
거침없이 오바마를 공격했다. 마치 반신(半神)처럼 숭상시 되는 오바마를 간단한 말 한마디로 추락시켰다. 주류 언론에 대한 선전포고도 서슴지 않았다. 낙태니, 하나님이니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말 대신 살아온 삶을 보여주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를 낳았다. 실수로 임신한 딸도 아이를 낳을 계획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오히려 열광했다.
어느 정도인가. 호감도 조사에서 오바마를 제쳤다. 과반수가 페일린의 러닝메이트 선정은 잘된 결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최소한 300만~600만 이상의 기독교인 표가 매케인-페일린 티켓 지지로 돌아설 것이다.” 기독교 우파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민주·공화 양당 전당대회를 통틀어 최대의 사건은 ‘페일린의 부상’으로, 공화당 전당대회가 끝난 시점에도 시선은 온통 그녀에 쏠리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페일린 현상’을 가능케 한 매케인의 정치적 본능이다.
페일린을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부상시키면서 문화전쟁을 촉발시켰다. 동시에 보수주의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그리고 이제 들고 나선 캐치프레이즈는 변화와 개혁이다. 무엇을 노리나.
자격시비만 하다가 쓴잔을 마셨다. 경험보다는 변화를 원하는 게 미국의 일반적 정서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 점을 간과했다. 매케인의 정치적 본능은 이 점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다섯 아이의 엄마다. 근로층 출신이다. 남편의 후광도 없다. 그런 그녀가 온통 ‘올드 보이 네트웍’인 부패한 권력구조를 정면에서 돌파해 주지사가 됐다. 그것도 한 쪽으로는 가정을 돌보면서. 개혁의, 변화의 기수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눈 여겨 보았다. 결국 40대 여성 러닝메이트 선정 도박은 ‘잭팟’을 터뜨린 것이다. 그 결과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오바마는 애써 얻은 전당대회 프리미엄을 까먹게 된 것이다. 8% 차이로 앞섰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사실상 타이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다시 원점이다. 앞으로 상황은 어떻게 변전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박빙의 접전에서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페일린 현상’인가. 매케인의 정치적 본능의 승리로 볼 수 있다. 다른 한 면 오바마 진영의 조소어린 과소평가도 뭔가 부채질 효과를 가져 오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역전극을 즐기게 마련이니까.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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