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독일의 통일은 정치적으로는 축복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독일에게는 통일부담이라는 인플레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통일 전 1990년의 3%대이던 인플레지수가 통일 후 1992년에는 5%에 육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통일 독일정부는 인플레를 막기 위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독일의 이자율은 두 자릿수까지 급속도로 올라갔다.
독일의 이자율이 오르자 당시 같은 유럽 통화체제에 속해 있던 영국의 환율에 비상이 걸렸다. 유럽 통화체제에서는 유럽 내 국가들의 환율이 서로 고정돼 있게 협약이 돼 있었기에 독일의 이자율이 오르면 독일의 마르크의 가치가 오르게 되므로 영국은 환율 방어를 해야 할 처지에 처한 것이다.
이 환율 하락의 압력을 막으려면 독일이 이자율을 낮추거나 영국이 이자율을 올려야 하는데 앞서 말한 대로 독일은 인플레 때문에 낮출 수 없고 영국은 당시 심각한 경기 하강을 겪고 있어 이자율을 올릴 수 없었다.
영국 정부는 어떻게든 환율을 방어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대세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고 결국 유럽 통화체제에서 영구히 탈퇴하고 영국 파운드화의 평가 절하를 감수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이탈리아도 같은 환율 문제를 겪었고 잠시나마 정부의 노력으로 환율을 방어하려고 애쓰다 다들 손을 들었는데 이 때 이들 국가들은 줄잡아 1,000억달러 이상의 외환시장 개입을 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환율사태가 끝난 이후 약 40억에서 50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 유명한 외환 계정 위기사건(Balance of Payment Crises)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투기의 귀재 조지 소로스가 10억달러 정도의 이익을 챙긴 것으로도 알려져 대세를 거스르는 환율 방어정책이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환율 비상이 걸려 있다. 연초에는 한국 원화의 가치가 너무 비싸 무역경쟁력에 문제가 있다고 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겠다고 정부가 나서더니 3월부터는 가치가 너무 떨어진다고 달러 팔기에 나섰다.
목표치 1,000원을 중심으로 몇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환율이 안정적인가 싶었지만 다시 8월에 들어 환율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정부에서 대세에 어긋나는 개입은 안한다는 입장을 취하자 원화가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상승을 하고 있다.
환율시장은 일반 국내 경제보다 외국 경제까지 영향을 미치는 매우 복잡한 시장이다. 각국의 이자율, 인플레, 국제 자금시장, 원자재 시장 등 한 국가의 경제 당국이 통제할 수 없는 굵직한 변수가 시시각각 영향을 미치는 시장이다. 이런 시장의 변화에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그리고 개입을 하면 대부분 국내시장의 교란만 일으키게 된다.
거기에 환율시장에 개입하면 환율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기능인 국가 경쟁력과 통화 정책의 자동조정 기능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킨다. 즉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한국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고 환율이 떨어짐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게 되며 외국 투자자의 입장에서도 투자 수익력이 올라 한국으로의 투자가 늘어나게 되는 시장조정 기능이 가능한데 인위적 환율 시장개입은 이를 방해하는 것이다.
결국 5개월 간의 한국 외환당국의 개입은 대세를 거스르는 것으로 판정 났고 당국조차도 이제는 대세에 어긋나는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잘한 결정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국내외 환율 전문가들이 정부의 개입은 대세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도 불구하고 개입을 했는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몰랐거나 잘못 판단했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외환 보유고만 줄어들었고 환시장에서 돈을 잃었으며 대세를 벗어나는 환율 개입 때문에 환시장의 혼란이 일어나 무역관련 기업들의 손실만 커졌다.
1992년의 유럽의 사례가 다시 생각나는 시절이다. 칼을 가지고 있으면 쓰고 싶다했던가. 당국자가 되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신념에 대한 값 치고는 너무 큰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운화
커먼웰스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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