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울산의 한 법정 안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민사소송 법정에 판사가 법전 대신 성경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 민사소송은 지난해 담임목사 청빙 문제를 놓고 싸움을 벌이던 같은 교회 교인들 사이에 제기됐다. 싸움은 급기야 폭행으로 번졌으며 형사소송에서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지자 한쪽이 다른 쪽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어 판사의 처분을 기다리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두툼한 재판 기록과 함께 성경을 들고 입정한 담당판사는 원고에게 고린도전서 6장을 큰소리를 내어 읽게 했다. 방청석에는 재판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두 파로 갈라진 이 교회 교인들 대부분이 나와 있었다.
원고는 재판장의 지시대로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써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는 너희 형제로다. ……” 성경을 읽어 내려가던 원고와 이를 듣고 있던 피고, 그리고 방청석의 교인들 모두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소송은 그 자리에서 취하됐으며 소송 당사자들은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세상의 법리 대신 성경의 가르침으로 교인들 간의 분쟁을 마무리한 판사의 지혜가 돋보인 재판이었다.
판사가 법정에서 읽도록 했던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 다양한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는 곳에 세워진 교회여서인지 교인들 간의 다툼과 분쟁, 그리고 송사가 끊이지 않던 골칫덩어리였다.
웬 파벌이 그리도 많은지 바울파, 그리스도파, 아볼로파, 게바파 등으로 나뉘어 사사건건 다툼을 벌였다. 툭하면 교회 안 문제를 들고 법정으로 달려가는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이 보낸 편지가 고린도전서이다.
교회는 무균실이 아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전한 교회를 꿈꾸지만 구성원들이 완전치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견해와 성격, 그리고 목표를 가진 개인들이 모여 있는 만큼 충돌은 피하기 힘들다.
신앙의 열정이 남달랐던 초대교회 안에서도 싸움이 그치질 않았다. 종교 문화적 배경이 크게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만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 지낸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라는 음식규례에서부터 할례에 이르기까지 교리적인 문제들을 놓고 논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한인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정신적·사회적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제는 연 예산 1,000만달러는 넘어야 대형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외형적인 규모는 커지고 있다. ‘교회의 월마트 현상’이라 할 정도로 작은 교회들의 생존 자체가 흔들리면서 대형교회 중심으로 재편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바람직한 교회 규모에 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다툼이 비교적 규모가 크다는 교회들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고린도교회도 대형교회였다. 가진 것이 많아야 다툴 것 또한 많아지는 것은 교회나 세속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한인사회의 한 대형교회에서 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여러 문제들이 얽히면서 감정 싸움,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비화된 듯하다. 여론을 등에 업으려는 듯 기자회견까지 주고받는 것이 보기에 영 좋지 않다. 일부 쟁점은 법정소송으로까지 비화돼 현재 공방이 한창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답게 성경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쉽다.
한 샘물에서 단물과 쓴물이 같이 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가르침은 단물인데 행위는 쓴물이라면 그 교회는 쓴물이 나는 샘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들어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14세기 독일의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이나 행동보다 됨됨이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학자였다. 본질적 됨됨이가 올바르지 않다면 어떤 행위를 해도 헛수고라는 것이다.
현재 다투고 있는 교회라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의 됨됨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세계 곳곳서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분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될까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에는 교회 내 분쟁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과 슬기로운 해결을 위한 조언이 아주 길게 담겨져 있다. 바울이 반복해 강조한 교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유익이 아니라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 세상 법리와는 사뭇 다른, 아니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자세이다.
결국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교회답게 풀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이다. 교회의 본질적 됨됨이를 좌우하는 것은 이것이다. 싸우던 교인들이 성경을 놓고 화해하는 모습. 이런 광경은 이제 세상 법정이 아니라 교회 안의 풍경이 되어야 마땅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