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남편 따라 미국에 온 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난 24일자 우리 신문 사회면에 실린 기사내용이다.
고학력의 20대, 30대 한국여성들이 전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결혼, 혹은 남편의 유학이나 취업으로 미국에 오고나면 무력감에 빠지기가 쉽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새로운 무대, 취업할 수 없는 체류신분, 언어장벽, 운전 미숙 등으로 능력 있는 여성들이 손발이 꽁꽁 묶이는 상황에 처하곤 한다.
일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일의 성과로 주위의 인정을 받는데 익숙하던 사람이 일을 잃고 나면 함께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바로 자존감이다.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자괴감에 우울증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혼란이 오는 것이다.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로 요즘 한국의 인터넷이 시끌시끌하다. 인기가 꾸준하던 이 드라마는 지난 회 ‘엄마의 가출사건’으로 시청률이 갑자기 35%로 뛰어올랐다. 극중 엄마(김혜자)가 1년간 휴가를 갖겠다며 집을 나가는 것이,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한국적 정서로는 너무 파격적인 때문이다.
‘엄마’는 60대 초반의 전형적인 서민층 전업주부이다. 시부모 모시고 삼남매 키우느라 나 먹고 싶은 것, 나 하고 싶은 것은 꿈도 꿔볼 겨를 없이, 빠듯한 생활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며 곡예하듯 살림을 꾸리고, 자고새면 삼시세끼 차리고 쓸고 닦고 식구들 뒷바라지하며, 그날이 그날 같은 날을 살아온 지 40년이다.
하지만 시아버지와 정년퇴직한 남편은 며느리/아내에게 살뜰하고, 결혼해 독립한 삼남매 역시 각자 살기 바빠서 그렇지 엄마 아끼는 마음은 남 못지않다. 특별히 호강은 못해도 평균 성적은 되는 삶이다.
그 주부가 “더 늦기 전에 혼자 한번 살아 보겠다”며 집을 나간 데 대해 네티즌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댓글들을 보면 ‘이해’ 보다는 ‘비난’이 많다.
“너무 이기적이다. 그렇게 나가고 나면 그 며느리는 무슨 죄로 살림을 도맡아야 하느냐” “훨씬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데 너무 유난스럽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면 여행을 다녀오면 될 일 아닌가” “가족들 팽개치고 나가다니, 엄마가 저럴 수는 없다” “여자들 기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튄다” 등이다.
반면 너덧 명 중 한명 정도는 ‘너무너무 이해된다’며 손뼉이라도 칠 태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엄마’와 비슷한 연령층의 주부들일 것이다.
“혼자 좀 살아봤으면…”은 자녀들 키우며 복닥복닥 사는 주부들 누구나 가끔씩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직장일은 끝나는 시간이라도 있지만 가족들 뒷바라지는 퇴근도 휴가도 없으니 거기서 놓여나 잠시라도 쉬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단순히 힘들다고 ‘가출’을 생각하는 주부는 없다. 문제는 자존감이다. 밥하고 청소하는 일은 해도 해도 생색나지 않고, 엄마의 수고는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부분 가정의 분위기가 문제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젊어서는 이런 저런 생각할 틈 없이 떠밀리듯 살았지만 나이 60 넘고 자녀들 모두 자리 잡고 나니 ‘나는 뭔가’ ‘내 인생은 돈 안 받는 도우미로 끝나는 건가’ 싶은 회의가 찾아든 것이다. ‘엄마의 가출’은 평생 뒷전에 밀어뒀던 ‘나’를 찾고 싶은 욕구,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고 싶은 욕구와 상관이 있다.
한국에서 ‘중년 제비족’이 활개를 치는 세태도 자존감과 무관하지 않다. 중년여성들을 노리는 이들 40대, 50대 제비에게 일단 ‘작업’ 대상으로 찍히면 안 넘어가는 여성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서글픈 현실은 이들이 특별히 잘 생긴 것도 말재주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피해 여성들은 사기행각이 드러난 후까지 “그분이 그럴 리가 없다”며 감싸곤 한다는 것이다.
여성들을 이렇게 사로잡는 무기는 바로 관심과 배려.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존재가치를 못 느끼는 중년 주부들에게 세심한 관심만큼 강력한 미끼는 없다는 사실을 제비들은 아는 것이다. 그 ‘전문가들’의 혜안을 빌릴 필요는 없는지, 내 가족들의 ‘자존감 지수’를 좀 살펴보자.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