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 시간이 되어 갑자기 딸아이가 몸이 아프다고 했다. 저녁을 먹기 전부터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고 배가 차고 아프다며 몇 번이나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걸 보고 뭔가 잘못 먹었나 싶어 오늘 먹은 것을 새삼 물어 보는 등 부산을 떨었다. 잠자리를 봐주고서 지난 주말 있었던 운동 경기와 그간의 일정이 좀 피곤 했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한 시간쯤 지나 깬 딸아이는 열에 들뜬 얼굴로 오한과 온몸 근육의 통증을 호소했다. 몸이 저절로 떨리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춥다고 말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의 얼굴을 보니 겁이 덜컥 났다.
‘어쩌지?’
일단 해열제를 찾아 먹이고 온몸에 얼음주머니를 몇 개씩 대어 놓았다. 엄마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꼭 잡고 누워 있는 아이 옆에 앉아 이마에 올려둔 찬 물수건이 떨어지지 않게 붙잡고 머릿속의 기도문을 아무리 외우려 해도 자꾸 엉키는 것이다.
‘오늘 누군가 서운해할만한 일을 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했나? 어제 보니 차고에 놓아 둔 끈끈이에 도마뱀이 잡혔던데.... 진즉에 치울 것을...... 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였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반성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난다. 이는 오랜 기간 반복된 버릇에서 굳어진 습관이다. 나는 아이가 아프거나 소소하게 성가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런 때에 맞지 않는 반성과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자학에 가까운 습관 뒤에는 외할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다.
내게 이 이상한 습관을 갖게끔 영향을 주신 분-자식이 잘못되거나 아픈 건 모두 부모 탓이라며 늘 강조하여 말씀하시던-외할머니는 사실 당신 자식 모두를 애지중지하며 금지옥엽 대하듯 하셨다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분이셨다. 그 옛날 대학 교육을 받으시고 당시 유학하신 소위 신여성으로 자식과 남편보다는 항상 당신의 일이 우선으로, 나는 자라면서 엄마의 외할머니에 대한 솔직하고 적나라한 불만과 불평을 자주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 분이 연세가 드셔서 자리에 앉기만 하시면 자식 허물은 부모 탓이라는 훈계를 하시니 듣기에 따라서는 민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언젠가 엄마 종아리의 상처를 보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저게 집에 있던 일하는 아이가 나 없을 때 씻기다가 저리 된 거잖아. 그 때 내가 옆에 서기만 했어도 저 흉터는 없을 텐데...”
아마 할머니는 젊어서 자식들과 같이 보내지 못했던 시간들을 어떻게든 보상하고 싶으신 것이리라. 어찌되었든 나의 불필요한 죄책감의 근저에는 외할머니의 보상심리가 한 몫을 단단히 차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나이 사십이 다된 지금도 친정 부모님의 걱정과 근심덩어리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한밤중이 넘어 울리는 전화는 확실히 엄마이거나 아빠다.
“별 일없냐? 꿈에 니가 울더라.”
“큰소리로 나를 부르던데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신통하게도 엄마, 아빠의 꿈은 뛰어난 예지력(!)을 가지고 있고 그 타이밍도 절묘한데다가 현실적이라 난 아마 나이 육십이 되어도 세 살짜리 꼬마일 때의 모습으로 부모님에게 보일 것임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찌 내 몸이 아프고 불편한 것이 부모님 탓이랴.
얼음주머니를 몇 번쯤 갈고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차게 하느라 욕실의 물대야가 방안으로 옮겨진지 얼마쯤 지났을까?
‘아, 감사합니다.’
열이 내리고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은 딸아이의 고른 숨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코고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제 자식을 낳아 키워 보면 부모님 마음을 헤아린다 하지만 그 마음의 질까지 가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자식이 아픈 것이 어찌 부모의 허물때문이겠는가. 나를 자책하는 것이 어찌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이겠는가. 그게 아니라 부모의 마음이란 자식의 고통에 너무 민감해 마치 피할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에 절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먼 타국에 떼어 놓고 좌불안석이신 분들에게 아침저녁으로 조랑조랑 다양한 걱정거리를 제공하는 속없는 딸의 안부에 마음 졸이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하릴없이 가슴이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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