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관계등 다각도 수사
최근 결혼하고 싶다는 말 자주해
주민들은 “원한 살 인물 아니다”
정확한 사망 시간.원인 부검 끝나야
칼에 찔려 변사체로 발견된 정토사의 목우스님 <본보 8일자 1면 기사> 살해사건과 관련, 버지니아 훠키어 카운티 쉐리프국의 찰리 밥 수사반장은 8일 “원한 관계를 비롯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현재로선 어떤 것도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밥 수사반장은 “현재까지는 이번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면서 “누가, 왜 그를 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밥 반장은 “유가족을 못 찾아 현재 장례일정을 못 잡고 있는 상태”라면서 “부검은 끝났지만 정확한 사망원인은 아직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목우스님은 지난달 29일 이웃 주민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될 당시 사망한지 수일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에 최종 부검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다.
쉐리프국은 워싱턴총영사관을 통해 목우 스님에 대한 신분확인은 이미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권태면 총영사는 “한국경찰을 통해 목우 스님과 연고가 있는 가족을 수소문하고 있지만 아직 못 찾고 있는 상태”라면서 “영사관은 이 사건 발생이후 직접 사건현장을 방문하고 지문확인을 통해 신변을 확인해주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뉴욕미주현대불교의 김형근 발행인은 “목우 스님은 한국에서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창립하는 등 진보적인 색채가 강했으나 이후 사상적으로 극우가 됐다”면서 “스님으로서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과 논쟁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목우스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워싱턴의 한 지인은 조심스럽게 “이번 사건이 여자문제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면서 “목우스님은 지난해부터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목우 스님은 지난해 12월 한국에서 선을 본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신문인 ‘워렌톤 카운티 리포트’의 라저 비엔키니 기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목우 스님은 지역사회에 침술과 뜸으로 유명했으며 누구에게 원한을 살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주민들이 말했다”고 전했다.
사건관련 제보 (540) 347-6870 훠키어 쉐리프국. <이창열 기자>
목우스님은 누구
최근 법복 벗고 싶어해
포교보단 독서.침술 소일...북 인권상황 비판도
지난 29일 변사체로 발견된 정토사(淨土寺) 목우 스님은 승속(僧俗) 동행의 삶을 살았던 특이한 스님이었다.
속명이 박두칠인 목우 스님이 출가한 것은 1977년경,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의 삶과 불교 귀의는 민청학련 사건과 뗄 수없는 연을 맺고 있다. 유신독재에 대한 거센 저항운동의 와중에 1974년 봄 터져 나온 민청학련 사건 당시 그는 서울 광화문에서 동생 박흥식과 레코드점인 ‘우드스탁’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유인물 등사 책임을 맡았다. 또 수배자 이철을 가게에 숨겨주면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2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그는 잠시 쉴 곳을 찾다 전남 송광사에 있던 법정 스님을 찾게 된다.
한 지인의 증언이다. “수감 중 면회를 다닌 수녀님들이 박두칠이 소개서를 법정 스님에게 써줘 송광사로 가게 됐다. 하지만 그곳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상주하고 있어 있을 곳이 못됐다. 그래서 법정 스님이 경남 사천의 다솔사로 보내주었다. 거기서 머리를 깎았다.”
다솔사는 한국 개혁불교의 법맥을 잇는 절이었다. 주지는 효당 스님이었다. 만해 한용운의 수제자인 효당의 문하에서 박두칠은 법복을 입었다.
목우(木偶)란 법명을 받은 그는 도량에만 있지 않고 속가에서 사회를 위한 보리행을 실천한 승려였다.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의 중심에 그와 역시 효당의 제자였던 여익구가 있었다.
1985년 5월 여익구와 목우 스님 등은 불교 최초의 재야단체인 ‘민중운동불교연합(민불련)’을 발족했다. 그는 부회장을 맡았다. 뒷날 이 민불련에 참여한 소장 승려들이 중심이 돼 ‘정토구현 전국 승가회’가 출범됐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이 승가회가 지나치게 정치적 색깔을 띠자 목우 스님은 92년 불교계 무크지 민족불교에 ‘민중불교운동의 반성’이란 제하로 자성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민중불교운동이 급진적인 이념을 탈피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불타의 자비를 구현할 때 역사와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목우 스님의 사회참여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구현됐다. 그는 서울 정릉의 한 사찰에서 무료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다. 그가 배운 침술로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치유해준 것이었다.
목우 스님이 도미한 건 98년경. 한국에서 ‘노인복지회관’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워싱턴을 방문한 그는 눌러앉을 결심을 했다 한다.
그와 수십년 교유했던 한 지인은 “목우 스님은 아마 미국에서 침술로 부족한 회관 건립자금을 모으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99년경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 정토사를 열었다. 싱글 홈을 구입해 거처 겸 절로 사용한 것이다. 정릉에 있던 정토사가 재개발되면서 받은 이주보상비가 구입비로 사용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포교나 신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혼자 기거하며 책을 읽거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들에 침과 뜸을 놔주는 게 대부분의 일과였다. 또 남는 방에는 학생들에 세를 놓아 그 수입으로 절을 운영했다. 이 무렵 그는 어려서 다친 상처와 90년대 강원도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가끔 한국의 신문에다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대부분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된 주제였다. 때론 일부 민주화운동 출신 인사들을 ‘빨갱이’라며 강하게 매도하기도 했다. 그의 변신은 탈북자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4년 전 목우 스님은 훠키어 카운티 마샬 인근의 한 주택을 약 35만 불에 구입해 사찰을 옮겼다. 스프링필드의 부동산 가격이 오른 데다 한국에서 일부 자금을 들여와 융자 없이 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곳에서 역시 목우 스님은 독서와 침술로 소일하며 바깥 활동 없는 조용한 날을 보냈다. 근래에는 법복을 벗고 속인의 길을 걷고 싶어 했다.
그의 서원은 그러나 6월이 채 가기 전 닥쳐온 불행으로 꺾이고 말았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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