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측의 첫 승리-콩코드 전투
주온경(데이비슨 초등학교 도서미디어 교사/새한국문화학교 디렉터)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160여년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미국이 영국군과 최초로 교전한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다.영국에 저항한 보스턴 근교 렉싱턴 지역의 식민지 민병대들과 영국군과의 첫 교전이었던 렉싱턴 전투는 10분만에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첫 승리를 거둔 영국군은 다시 집결하여 렉싱턴에서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콩코드로 향했다. 민병대들이 보관해놓은 군수품들을 파괴시키기 위해서였다. 영국군들은 콩코드의 민병대들도 영국군을 보면 역시 도망갈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로부터 1시간 반 뒤에 프란시스 스미스 중령은 7백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콩코드에 진입했다. 그때 콩코드에서는 65세의 제임스 바렛 대령이 이끄는 수백명의 미국 민병대원들이 초조하게 영국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1시간… 2시간… 3시간이 흘렀다. 민병대들은 붉은 군복을 입은 영국군들(Redcoats라고 불림)이 마침내 자신들의 마을 어귀에 들어와 숨겨놓은 무기와 화약을 탈취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군들은 민병대들이 대포를 나르는데 쓰던 나무로 된 수레들을 찾아내 길거리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연기가 곧 콩코드의 하늘을 뒤덮었다. 그 때 저들을 그대로 놔둘 겁니까?라고 한 민병대원이 묻자 바렛 소령이 민병대들에게 행진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민병대들은 콩코드 마을 입구에 있는 북교(North Bridge)를 지키고 있던 영국군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수백명의 민병들이 무기를 들고 행진해오자 영국군들은 다리의 저쪽 끝으로 후진하면서 무기를 들었다. 발포명령이 없었는데도 곧이어 영국군들의 발포가 시작돼 순식간에 데이비스 대위와 1명의 민병대원이 전사하고 수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바로 그 순간 민병대의 지휘관이 발사명령을 내리자 모든 민병대들이 일시에 소리치며 응사하기 시작하여 십여명의 영국군 사상자가 발
생했다.
콩코드 민병대의 필사적인 응전과 주위의 마을로부터 지원을 받아 계속 늘어나는 민병대의 숫자를 본 영국군들이 드디어 보스턴 방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민병대들은 도망가는 영국군들을 끝까지 쫓아가 한 명이라도 더 사살하려고 했다. 이렇게 영국군과의 콩코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인근 40여개의 마을에서 3600명의 민병대원들이 콩코드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콩코드부터 보스턴까지의 약 20마일의 길은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1775년 4월19일 오전10시에 시작된 콩코드 전투는 오후7시까지 이어져 민병대들은 영국군들을 보스턴까지 완전히 몰아냈다. 이 콩코드 전투에서 3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영국군은 부상병들을 이끌고 보스턴 인근으로 퇴각했으며 이 전투에서 사망한 민병대 수는 100여명 정도였다.
콩코드 전투는 미국 독립혁명 전쟁에서 미국측의 첫번째 승리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렉싱턴에서 콩코드로 이어진 전투는 미국 독립혁명의 발단이 됐으며 영국과 전 세계에 식민지역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려는 식민지 주민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의 식민지 거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필자가 방문한 렉싱턴과 콩코드는 매사추세츠주 특유의 청교도적인 운치가 배어있는 전원마을들이다. 아담한 몇몇 상가지역을 제외하고는 콜로니얼식 저택들과 초록색 숲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200여년전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전투들을 생각하면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 전투가 개시된 콩코드 마을 입구의 다리(노스 브릿지)밑 강에는 주말을 이용해 카누를 즐기는 가족들로 여유롭게 보인다. 다리옆 벤치에서는 많은 관광객들이 이 국립사적지 안내원의 당시 전투상황에 대한 설명을 열
심히 듣고 있었다. 다리 저쪽 편에는 그 유명한 ‘미니트 맨(Minute Man)’의 동상이 길가운데 서있는데 이 동상은 당시 1분내에 전투태세를 갖추고 집결해야 했던 민병대원을 상징하고 있다. 군복도 없이 셔츠와 바지차림에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머스켓 총을 다른 한 손에는 농기구를 쥔 한 청년민병대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동상은 1872년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가 만든 것이다. 다니엘 체스터 프렌치는 후에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 안에 있는 링컨대통령의 동상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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