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에서 수 십 년을 살았다는 분이 쓴 글을 우연히 읽었다. 그 글에 따르면 적지 않은 수의 한인 가정 청소년들이 다른 한인들과의 접촉을 피하거나, 한인임을 숨긴다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 강한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보다 좀 더 그렇다고 한다.
물론 이런 개인적 경험을 절대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은 여러 지역과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지나친 일반화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얼핏 이런 일은 매우 사소한 개인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화적, 역사적 현상이며, 동시에 권력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인문학자들에게 학문적 영감과 방법론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셀 푸코, 피에르 브루디외, 그리고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앞의 두 사람은 프랑스인이고, 사이드는 팔레스타인계 콜롬비아 대학 영문학과 교수였다. 푸코는 단순히 ‘객관적인’(즉,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한) 지식이란 없다고 말한다. 모든 지식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의식적 무의식적 의도가 들어간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지식이 의도적인 거짓말이라는 뜻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비교동물학은 매우 권위 있는 지식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당시에 인종간의 우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오늘날 그것은 체계적인 편견의 집합체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지식의 사회적 기능은 매우 거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촘촘하고 미묘하게 일상생활 속에 녹아있어서, 많은 경우 문화적인 모습을 띤다. 브루디외에 따르면 인간관계를 맺는 다양한 기술과 범위, 문화적 취향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이루 헤아리기 힘든 미세한 것들조차도 결코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시골 출신의 학생이 서울에 와서 시골 출신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할 때 주의해야하는 모든 사항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사이드는 이런 관계가 한 사회, 한 국가 안에서만 끝나지 않고 문명의 범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의 유명한 책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동양’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는 바로 그런 것임을 말한다.
‘서구’는 유럽대륙을 말하는데, 사실 유럽은 대륙이 아니다. 그저 유라시아 대륙의 한쪽 귀퉁이이다. ‘서구’(혹은 ‘유럽대륙’)가 실재하려면 그 반대편에 ‘동양’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인도와 중국이 하나로 ‘동양’이라고 분류되는 것이 분류로서의 의미가 있을까? 사이드에 따르면 서구의 ‘동양’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침략이 ‘지리상의 발견’ 혹은 ‘선진 문화의 전파’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흔히들 미국 문화를 ‘멜팅 팟’이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 어떤 문화를 가진 채 미국에 오든, 미국 문화에 모두 섞여야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때 ‘멜팅 팟’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문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역사상 어떤 제국도 ‘멜팅 팟’으로 불러 무방한 문화를 가진 경우는 없었다. 이 말은 마치 ‘객관적 지식’이라고 말할 때의 진실성 정도만을 가질 뿐이다.
설사 어떤 개인이 스스로 그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해도 그것의 허용 정도는 기존 체제와 주류문화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주류문화에 속한 선량한 개인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류문화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다.
주류 문화는 다른 여러 문화들 중에서 스스로를 그것들의 기준으로 혹은 그것들보다 더 고상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주류 문화가 성립할 때 모든 다른 문화들은 낯설거나 심지어 이상한(영어로 두 단어 모두 똑같은 ‘strange’인 것이 우연일까?) 문화가 된다. 하지만 어떤 문화도 그 자체로 낯설거나 이상할 수는 없다. 모든 문화는 인간집단이 그 집단이 놓인 내적 외적 조건들 속에서 적응해간 인간관계의 결정체이다. 때문에 모든 문화는 인간들의 생물학적 조건 위에서 보편적이며 동시에 다양한 시대적 환경적 조건들 속에서 특수하다.
하지만 이런 모든 사정을 이해해도 어떤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겪는 마음고생은 어른들의 현명한 설명과 따듯한 사랑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만 오해를 받아도 괴로운 법인데 거대한 사회적 편견에 노출된 아이들의 형편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럼에도 인간사의 오랜 지혜는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만 끝내는 다른 사람의 존중도 받는 법이라고 말한다.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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