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떨어지는 물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는 말이 있다.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것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의 비유로 더 자주 쓰인다.
물 한 방울이 갖는 위력은 사실 생각보다 크다. 실낱같은 틈새만 있어도 악착같이 파고 들어가는 모세관 현상, 자연계의 원소 중 절반 이상을 녹여버리는 용해작용, 산화를 도와 금속을 녹슬게 함으로써 푸석푸석 부셔버리는 힘 등으로 견고한 건축물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 물이다.
그래서 15세기 이탈리아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비를 원망했었다. 비, 즉 물은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결코 놓치는 법 없이 기어이 그 틈으로 흘러들어가서, 서서히 건물을 약화시켜 결국은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고 그는 탄식했다.
겉보기에 위풍당당한 건축물이라도 물이 스며들어 습기가 차면 건축 자재가 썩거나 녹슬면서 마침내 폐가로 무너져 내리는 현상을 가슴 아파 한 말이다. 지금의 건축가들이 비에 무덤덤한 것은 페인트나 라커, 특수자재의 방수효과 덕분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습기가 끼어들곤 한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을 것 같던 단단한 관계가 어느 순간 물 한방울 스며들어 수분의 침식작용이 진행되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바로 의심이라는 물방울 혹은 습기이다. 의심이라는 눅눅한 습기가 감정의 내면을 그득 채우면 배신감, 질투, 분노, 증오 같은 곰팡이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면서 세상없을 것 같던 사랑의 관계도 그 축이 무너지고, 종종 사랑한 정도만큼의 파국을 몰고 오곤 한다.
지난 23일 남가주 랭캐스터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중반의 한인여성과 10살 전후의 남매, 그리고 여성의 사촌 형부인 백인 남성 등 네 사람이 불에 탄 처참한 사체로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에 의하면 범인은 이들 네 사람을 흉기로 살해한 후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한꺼번에 네명씩 죽이는 일의 힘겨움을 생각해볼 때, 범인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이성도 감성도 완전히 마비된 지옥 불같은 증오가 아니고는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엇이 그를 그런 눈먼 증오로 내몰았을까.
경찰은 일단 숨진 여성의 전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쫓고 있다. 주변 친지들의 말로는 이 남성이 의처증이 심해서 부인이 견디다 못해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혼 과정에서도 갈등이 몹시 심했다고 한다.
아직 범인이 체포되지 않은 만큼 사건의 진상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전혀 엉뚱한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사건일수록 범인은 배우자나 연인 등 이전에 사랑하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그리고 부부·연인 사이를 허물어트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참고해볼만하다. 사랑과 증오(愛憎)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모든 사랑하는 관계는 삐끗하는 순간 증오로 돌아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의심이 몰고 오는 비극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세익스피어의 ‘오델로’이다. 오델로는 검은 피부의 무어인이면서도 베니스 공화국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장군이자 아름다운 귀족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맞은 행운의 남성이었다. 그런데 그의 승승장구가 친구 이아고의 시기심을 부채질 했다.
오델로를 파멸로 몰기 위해 이아고는 음모를 꾸미고 데스데모나가 바람을 피운다는 거짓말을 한다. 아내를 의심하게 된 오델로는 질투와 배신감에 눈이 멀어 결국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뒤늦게 아내의 결백을 알게 된 후 자살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믿고 의심하는 망상을 ‘오델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부부가 한평생을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는다. 부부로서 도저히 같이 살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들도 발생한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단지 의심 때문에 가정이 깨어진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노릇이다.
집안의 문을 모두 열고 통풍을 자주 해야 습기가 차지 않듯 마음의 문을 자주 열 필요가 있다. 단 배우자가 병적인 의처증·의부증이라면 통풍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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