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꽹과리를 두드리며 우리 가락에 흠뻑 빠져들면 정말이지 모든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는 개운함을 느껴요.”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2세지만 길영빈(14·미국명 스테이시·롱아일랜드 휴렛고교 9학년)양은 한인 1세 못지않게 신토불이의 매력을 잘 이해하고 또 그만큼 그 매력에 푹 빠져있다.처음 사물놀이를 접한 것은 4년 전 원광한국학교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징, 장구, 북, 꽹과리까지 차례로 고루 섭렵했고 올 봄 학기에는 마침내 원광한국학교 풍물패의 리더인 상쇠도 맡았다.
올 5월 ‘2008 어린이 민속 큰 잔치’ 공연을 비롯, 재미한국학교 동북부협의회 주최로 열린 ‘제22회 어린이 예술제’ 무대에 이르기까지 신명나는 가락으로 대단한 활약도 펼쳤다. 14세의 앳된 소녀가 들썩거리는 어깨춤에 맞춰 꽹과리로 신호하며 수십 명의 풍물패 단원들을 리드하는 모습은 나이보다 깊은 노련함과 더불어 자못 나름의 비장함마저 서려있을 정도다.
때로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두들김 소리에 귀가 아프기도 하지만 한바탕 놀이를 하고 난 뒤에 얻는 쾌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물놀이의 매력이란다. 연습할 때 장난치며 더러 말을 안 듣는 어린 후배들도 있지만 타고난 큰 목소리와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활달한 성격을 앞세워 단원들을 하나로 이끌어가는 지도력도 타고 났다.
“사물놀이는 리더인 상쇠의 표현 능력에 따라 다른 악기들과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리더십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어린 후배들을 친구처럼 포용하고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자신만의 리더십 구축 요령을 귀띔했다.
4년간 연습하며 실력을 다져온 비올라와 사물놀이 악기들을 서로 비교하는 일은 어쩌면 무리일 수도. 하지만 “비올라는 줄로 음의 높낮이를 만들어 표현하는 섬세하고 차분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반면, 사물놀이는 음의 높낮이보다는 소리의 크고 작음과 강약을 조절하며 느낌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과 표현력을 더 요하는 악기”라고 또박또박 설명한다.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 연주자로도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은 사물놀이를 하는 악기들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고. 특히 이중 꽹과리와 장구는 더욱 애착이 가는 악기들로 요즘은 장구를 다시 익히느라 정신없다. 연습 때마다 행여 이웃들이 무당 집으로 오해라도 할까 싶어서 숨소리 죽여 박자만 맞추는데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 다소 아쉬울 뿐이라고.
올해 한국학교를 졸업하면서 상쇠 자리도 후배에게 내주게 됐지만 지도교사의 주선으로 8명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뉴욕사물놀이패’에서 사물놀이 연주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또한 이번 여름방학 동안에는 그간 소홀했던 운동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탁구를 시작할 예정이다. 동시에 한창 호기심이 생긴 기타 연주 실력도 다져볼 계획이다.
지난해 여름방학 동안 30시간 도서관 자원봉사 활동을 펼친데 이어 올해는 원광한국학교 서머캠프에서 보조교사로도 지역사회 봉사에 참여한다.
1세 못지않게 어려운 단어까지 척척 사용하며 한국어를 구사하다보니 살아가면서 나름 얻는 것이 많아졌다는 부연 설명도 곁들인다. 1.5세 출신인 부모와는 사실 영어 대화가 더 편하지만 조부모와 함께 살던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는 가정규칙을 지켜온 덕분이다. 한국어를 잘하게 되면서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보니 한국어 학습 욕구가 더욱 생겨나고 동기부여까지 돼 더욱 열심히 배우려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
덕분에 한국어 구사력은 물론, 글짓기 대회에서도 다수의 입상 경력을 쌓았고 한영, 영한 번역대회에서도 최근 은상을 수상했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추게 됐다. 이번 주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시험이 한창이지만 현재까지는 전 과목 A 성적을 받은 우등생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과학부에 소속돼 교내 과학경시대회에서 다수의 입상 경력을 기록했고 교외 학생 과학경시대회를 위한 사전 준비도 현재 차곡차곡 진행해나가고 있다. 아직 대학에서 전공할 학과나 장래 희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진 않았지만 돈벌이보다는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면서 동시에 사회에 이바지도 할 수 있는 직종으로 진출하고 싶은 꿈을 키워가고 있다. 길세환·길성희씨 부부의 1남1녀 중 첫째.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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