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생님들 중 한 분은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 내 친구 하나는, 학부 때 리포트를 제출하고 몇 년 후 대학원에서 비슷한 주제로 또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그 내용에 차이가 없는 것을 이분이 간파하더라는 말을 했다. 진땀나는 기억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그 사진 같은 기억력 때문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분이 “정년이 필요하기는 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 그분이 60살 쯤 되셨을 때였던 듯싶다. 당시 내가 보기에 그분은 체력으로나 총기로나 전혀 그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뒤따르는 말씀인 즉, 사실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상황에 대한 판단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과연 명석하신 분이었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어떤 사실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사실들이 생겨난다는 것만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들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방식도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그 새로운 방식에 대한 인식능력을 컴퓨터 운영프로그램처럼 쉽게 지우고 새로 깔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게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지난 번 정부가 시작될 때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었던 이의 말은 지금도 새롭다. 당시 기자들이 장관에 임명된 소감을 묻자, 그는 “‘공익근무’하는 셈 치죠”라고 말했다. 공익근무란, 소위 말하는 ‘방위’이다. 그에게 장관 일은 그의 본업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좀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서 하는, 공익에 대한 봉사일 뿐이었다.
그 때 나는 그 말이 고위 공직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분들은 자기들이 속했던 집단에서 언제나 가장 우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똑똑하지 못하(다고 믿었)고, 나이도 어린(듯이 보이는) 사람이, 자신들의 인생 목표인 장관직을 ‘공익근무’에 비유한 것이다. 아마 그분들은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바뀐 세상의 새 운영체계에 이들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아마 많이 억울했을 것이다.
지난 며칠 내내 인터넷으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를 보았다. 그 양상은 소위 ‘386세대’인 나에게도 낯설었다. 우리 때는 주로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이 주류였다. 분위기는 비장함과 두려움이 섞여있었고 양상은 격렬했다. 지도부와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화면 속의 시위는 모든 점에서 달랐다.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말 그대로 남녀노소였다. 분위기는 발랄했고, 지도부도 작전도 없는 듯이 보였다. 이것들이 사라진 곳에 자기들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과 그로 인한 당당함이 있었다. 지금 40대인 386세대에게도 낯선데, 60대 전후의 소위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그 시위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 ‘입력’ 자체가 안 되었을 것이다. 변한 것은 시위의 양상만이 아니다. 그 밑에 흐르는 가치와 감성, 그에 기초한 세상사에 대한 판단과 행동방식 즉, 문화가 바뀐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은 결국 한국이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많이 바뀐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에는 가부장적인 농경 세대, 전체주의적 색채가 강한 산업화 세대, 그리고 개인의 가치가 중요한 정보화 세대가 뒤엉켜서 살고 있다. 젊은 세대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말 그대로의 의미로 믿고 행동한다. 공권력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내 세금으로 부지되고, 따라서 나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해야하는 대상일 뿐이다. 이 젊은 세대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이든 세대의 상상력 너머에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안타깝지만 그 반대도 사실이다.
미국에서 매년 총기로 죽는 사람들이 3만 명이 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면에 이라크 전쟁에서 죽는 병사들은 일 년에 1,000명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총기 사망자보다는 전쟁 사상자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총기 문제의 뒤에는 강력한 로비단체의 존재가 있다. 하지만 미국인의 가치관과 감수성이라는 문화적 배경이 없이 그런 로비가 힘을 쓸 수 있을까? 미국의 총기 사고와 이라크 전쟁이 산술적 계산에 따른 비교의 문제가 아니듯, 마찬가지로 광우병 문제 역시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말하는 확률과 과학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문화 사이에 소통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부패와 발효는 화학적으로는 같은 개념이다. 그것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과학이 아니고 문화이다. 즉 어떤 것이 썩은 것이고 어떤 것이 발효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고 문화라는 말이다. 그래서 치즈와 김치는 문화적이다. 다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외국인이 두 가지 음식을 제대로 감식하는 것만큼 어렵다. 문화 사이의 소통이란 흔히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시위하는 사람들이 답답해하는 만큼, 아마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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