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난 지 어언 41년이 되고 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여러 번 다녀왔지만 갔다 올 때마다 한국의 변하는 모습과 또 우리의 변하는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아주 귀한 것을 잃는 것 같은 아주 서운한 마음도 느낄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 나갔다가 한국에서 아무리 재미있고 즐거웠었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오면 멀리서 LA의 불빛이 보일 때 안도의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 내 집에 왔구나!” 하고.
40여년 전에는 한국과 미국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지금처럼 신문방송으로 매일 최신 뉴스를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딱 4면짜리 신문이 우편함에 배달되기 시작한 것도 한참 후였었다. 그래서 동부에 있는 형이나 미시간에 있던 누이에게 무엇인가 소포로 보낼 때면 물건도 물건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신문지를 많이 넣어서 그리운 고국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면 그 신문은 한번 보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읽고 또 읽고, 또 혹 다른 한국 사람을 만나면 아주 귀한 물건처럼 벌써 구문이 된 신문을 돌아가며 읽던 시절도 있었다. 기사뿐만이 아니라 광고까지 샅샅이 읽으면서 말이다.
그 당시에는 한국하면 내 고향이요 생각만 해도 눈물을 머금게 하는 고국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신문이 배달되고 현지 방송국이 생기고 했을 때,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보곤 하였는데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그립다기보다는 새롭게 변천해 가는 한국의 모습에 대한 호기심이 더 작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뉴스는 물론이요, 연속극을 봐도 “아, 한국이 이렇게 변했네!”하며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무대장식, 또 현지 촬영일 때는 주위 길거리, 다니는 자동차, 하다못해 행인들의 옷 입은 것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보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보기도 했다.
가령 예를 들면 왜 학교가 어느 학생을 어떤 방식으로 선발하는가에 대해 국가적인 획일 안을 세워놓고 일일이 간섭을 해야만 하는가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학교가 잘하면 잘되고 못하면 도태될 것이 아닌가? 지망생보다 정원이 턱도 없이 모자랐을 때야 그랬다 처도 이제는 지방대학도 많이 생겨서 많이 자율화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미국에서 한 유명한 기숙사 학교에 여름학기를 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화제 중 하나가 당시 Warner Brothers라는 큰 기업의 주인의 아들이 기숙사에서 대마초를 피다가 발각이 된 사건이었다. 규정상 퇴학이여야 했지만 그 학생의 아버지가 당시 10여만달러가 넘는 파이프 오르간을 학교에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무마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때 대다수의 반응은 비싼 오르간을 쉽게 구하게 되어서 모두 좋은 음악을 듣게 되었다고 반가워하는 쪽이었지 부잣집 아들이라고 퇴학도 안당하고 지나갔다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엉뚱한 짓을 해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부모에게 누를 끼친 못난 아들에게 동정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말이다. 아마 한국 같았으면 특종감이였으리라.
지금 한국은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놓고 촛불시위를 하는 등 야단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41년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못 먹었어도 적어도 2~3톤의 미국산 쇠고기를 먹었을 그리고 아무 탈이 없는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완전 개방된 미국시장에 여태껏 인삼에서 빨간약, 그리고 자동차까지 꼭 무해하지만 않은 물건들도 마음 놓고 팔아 온 미국에서 들여오는 쇠고기를 말이다.
원래 강제적인 요소는 없고 오히려 강제적으로 사오지 못하게 하던 것을 각 업자에게 맡기고 소비자가 싫으면 안 사먹으면 되는데도 말이다. 아마 한국의 쇠고기 값이 턱도 없이 비싸니까 너무 사먹을 사람이 많을 것 같은 것이 더 큰 우려가 아닐까?
물론 한국 국민들이 광우병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 시위의 근본 이유이고, 정부가 국민의 소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말이다.
여름이 시작되어서 이제 이곳저곳에서 공부를 하던 아이들의 계획이 확정되었다.
한국에 전에 다녀왔지만 꼭 다시 한국에 들르고 싶어 하던 아이들도 부득이 다음으로 미루어졌다고 한다. 한 아이는 직장이 정해져서 시카고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을 방문하고 곧 바로 유럽으로 떠난다고 한다. 가능하면 자기가 유럽에 있을 때 엄마 아빠도 한번 와서 같이 여행을 해보자고 한단다. 그렇게도 한국에 가보고 싶어 하던 막내도 내년의 바쁜 스케줄에 대비해서 몇 과목 더 해놓겠다고 하고 한국 방문은 다음으로 미루었다고 한다.
남아연방으로 향하는 아들은 다큐멘터리 촬영할 카메라 장비를 빌리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돈 좀 보내 달라고 연락이 왔다. 누나 졸업식이 끝나는 대로 곧 출발한다고 한다. 혹 자식 덕에 남아연방 구경을 할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본다.
우리 부모 세대에는 미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 때문에 여기저기 번갈아가며 미국 구경을 하시는 것이 고작이었고 혹 자식들이 주선해서 중국, 유럽, 남미 등을 여행사 따라 다녀오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시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서 잘하면 미국이 아닌 해외에도 손자를 보기 위해 몇 년 다녀오는 시대가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랴.
한국의 대학들이 미국에도 캠퍼스를 낸다고 하는데 미국에 있는 한인 학생은 물론 여러 현지의 학생들을 모집하려면 쇠고기도 마음대로 수입 못하는 자세로는 세계화된 현세대에 너무 어울리지 않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하루 속히 국민의 소리와 정부 정책이 조화를 이뤄 더욱 활기찬 조국을 기대해 본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213)210-3466, johnsgwhang@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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