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계속 오르면서 살림살이가 나날이 버거워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 이미 고달픈데 요즈음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또한 반갑지 않다. 쇠고기 협상을 둘러싸고 연일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정부의 협상 실패를 질책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볼 수 있게 된 이 촛불행사는 지금까지는 보통 ‘촛불시위’ 또는 ‘촛불집회’라고 했는데 이제는 ‘촛불문화(제)’ ‘촛불정치’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온 나라가 촛불로 뒤덮이고 있는 형국이니 ‘촛불파동’이라고 할까?
새 정부가 출발한지 100일 여만의 일이지만 한국에서 큰 사건 때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이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일찍부터 데모, 농성 등 집단저항 행동에 길들여져 온 한국에서 이러한 촛불행사는 전혀 놀랍거나 뜻밖의 일이 아니다. 다만 촛불문화나 촛불정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제 이러한 집단행동이 정당화되고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무슨 일에나 촛불만 들고 나가면 정당하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현실이 놀랍다는 말이다.
원래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이는 일은 영어문화권의 ‘candlelight vigil’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것이 한국에서 문화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candlelight’은 그대로 ‘촛불’이 되었지만 마지막의 ‘vigil’이란 말이 ‘시위’ 등으로 변질된 것이다. ‘vigil’은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든가, 누가 죽었을 때 추모하면서 그 영혼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운다든가, 적을 경계하기 위하여 자지 않고 경비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반면 시위(示威)는 글자 그대로 남에게 자기의 힘을 보이는 것, 즉 위(威)세 또는 위력을 보여준다[示]는 말이다. 그래서 시위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demonstration of power or force’이고 여기서 ‘demonstration’의 준말 ‘데모’란 말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촛불로 밤을 밝혀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고 추념한다는 방어적 의미의 ‘vigil’이 힘을 과시하는 공격적 시위로 바뀌었으니 이는 커다란 문화적 변용이다.
가냘프고 여린 의미의 촛불이 한국에서 시위나 저항, 공격 등의 거친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앞서 말한 한국인들의 강한 집단저항 성향 때문이라고 하겠다. 논리적 분석과 이성적 판단에 의해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여 촛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많겠지만,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부화뇌동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짐작된다.
거기에 이것도 하나의 멋지고 신나는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따라나서는 철없는 어린 학생들도 있을 테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단체들도 가세되었을 것이다. 신문과 방송은 알게 모르게 이를 부추기고.
촛불 모임의 배후에 친북 세력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란도 있지만, 그 진부에 관계없이 근본적으로는 집단 쏠림 현상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좋은 일이든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든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집단 쏠림 현상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장갑차 사건 때 그랬고 황우석 파동 때 그랬고 월드컵 때 그랬다.
집단 쏠림 현상은 또 유행이나 풍조를 따르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명품 추구, 조기 유학, 영어 열풍 등등.
세계에서 ‘우리’라는 말을 가장 흔하게 쓰는 그래서 자기 배우자마저도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기에 한국인들의 집단주의 성향에 의문이 없다. 여럿 중에 한 개가 다르면 그건 ‘다르다’라고도 하지만 그건 ‘틀리다’라고도 말하는 한국인들의 말버릇 속에는 다르면 틀리다 즉, ‘different=wrong’이라는 집단적 일체 성향이 배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리에서 홀로 벗어나는 것보다 같이 휩쓸리는 것이 쉽고 편하다.
이러한 집단 쏠림 현상을 군중심리학이라고 한다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그 현상이 촛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으니 촛불 심리학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촛불 심리학의 바탕에는 집단 속에 개개인의 정체가 가려지게 되는 익명성이 도사리고 있음도 본다. 그래서 신속성과 보편성에 익명성까지 곁들여진 인터넷이 한국인들의 집단 쏠림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쇠고기 협상 문제도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서, 즉 연구와 조사와 논의를 거쳐 잘잘못을 가리고 개선을 기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국사회가 다원적, 복합적 사회로 성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집단 쏠림 현상을 지양해야 하고, 특히 대의 민주제의 근간을 흔드는 집단저항 현상을 하루빨리 근절해야 할 것이다.
장석정
일리노이 주립대 경영대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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