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시간을 정해놓고 시험지로 보는 마지막 시험은 박사논문 제출을 위한 예비시험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이것을 종합시험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배운 것을 종합한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 같다. 이제는 시험 문제는 물론이고, 몇 과목을 보았는지도 흐릿하다. 하지만 시험지를 내고 나오며 “내 인생에서 시험지로 보는 시험을 이제는 더 이상 안 봐도 되나?”하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하다.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시험은 긴장도 했고 제법 준비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박사과정 입학시험이나 종합시험은 그러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공부에 흥미를 잃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공부 때문이었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어떤 사실도 몇 마디 말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핏 명료해 보이는 것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기에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정답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합의인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답안지에 써내야 하는 정답들 중 많은 것이 합의조차 안 되거나, 합의의 유통기간이 지난 것들이었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정답으로 써내야 하는 일은, 시험공부의 의욕을 꺾기에 충분했다.
시험과 공부는 너무나 밀접해서 별개로 생각하기 어렵다. 시험공부처럼. 그래서 시험을 잘 보면 공부도 잘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때때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공부를 하다보면 종종 흥미로운 일을 본다. 대학원 입학생들 중, 학부 때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어도 대학원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이런 학생은 이미 완성된 지식에 대한 학습능력은 뛰어나도, 미지의 것에 대한 연구능력이 떨어지는 셈이다.
반면에 흔히 말하는 좋지 않은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대학원에 들어온 학생 중에 흥미 있는 주제로 상당히 괜찮은 논문을 쓰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학습능력과 연구능력은 별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학 혹은 그이상의 교육의 목표는 뒤쪽에 가깝다.
교육의 주요한 한 측면은 그런 자질을 발굴하고, 또 그것을 제도적으로 조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개 그렇듯이 여기에 시간과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돈이 든다는 점이다. 사회와 국가가 그런 돈을 투자하려면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것은 제대로 된 교육이 사회경제적으로도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뽑아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은 확실히 다른 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선진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한국은 아직까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교육을 위해서 시험을 보조적으로 이용하는 경우와, 교육의 주요한 내용이 시험공부인 경우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두 가지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가진다. 후자의 경우는 교육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경쟁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그 목적이 경쟁을 통한 배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비해서 투자자원이 풍부하지 못할 때 교육은 대개 경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때 국가는 시험을 통제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나 오늘날의 각종 국가고시처럼. 오늘날 한국에서 대학에 대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대학에서의 교육 자체가 아닌, 입학시험과 취직시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런 현실과 무관할까?
시험을 통한 경쟁의 부정적 측면은 그 경쟁의 결과가 학생들에게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늘 남에게 뒤졌던 학생이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을 갖기는 어렵다. 시험은 많은 경우에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과 다수의 ‘열등한’ 학생들을 만든다. 사실 어떤 학생이 어떤 부분에서 더 우수한지는 분명치 않다. 우수한 줄 알았는데 사실 우수하지 못한 경우에는 별문제가 없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해로운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의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어서, 일단 열등한 쪽으로 분류된 학생은 잠재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평생을 살게 된다.
전근대사회, 즉 사회적 발전의 속도가 매우 더딘 신분제사회에서는 시험을 통한 사회구성원의 분류와 배제가 사회를 안정시켰다. 이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중요한 시험들이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자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그런 사회는 발전은커녕, 더 이상 지속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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