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대선의 해였던 2002년 봄 한국의 여성계는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다. 화두는 ‘박근혜’. 여성들이 박근혜를 ‘지지해야 한다’ ‘지지해서는 안된다’를 둘러싸고 진보적 여성 진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실 그 이전까지 박 의원은 여성계에서 관심권 밖의 존재였다. 자신의 역량이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계에 무임승차한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로 진보성향의 여성계는 그를 정치인으로 인정하는 데조차 인색했다. 하물며 ‘박근혜 지지’는 공개적으로 입에 올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젊은 여성주의자가 “박근혜를 찍는 것이 진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으면서 ‘박근혜’는 여성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그해 박 의원이 대권에 도전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여성주의자의 논리는 여성 정치인은 ‘희귀동물’이라는 것, “멸종 위기의 동물은 그게 해충이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성차별적인 정치 환경을 뛰어 넘어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키려면 현실적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인 박근혜를 여성들이 힘을 모아 밀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여성’이 아니다”는 반박이 즉각 제기되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고 다 여성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개발독재와 보수 가부장적 권력의 상징인 박정희의 후광으로 부상한 인물에게 ‘여성’의 대표성을 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98년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된 ‘박정희 향수’의 주인공, 박근혜는 여성계에서 선뜻 껴안을 수도, 내칠 수도 없는 애매한 존재였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바뀌었다. 지난 연말 한국 진보 여성 진영을 대변하는 여성신문은 박근혜 의원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17대 대선 과정에서 모범적 정치인상을 보인 것이 선정 배경이었다. 아울러 그 얼마 전 그는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합리적이고 신사적인 의원을 뽑아 수여하는 ‘백봉신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개인적으로 지지하고 안하고를 떠나 ‘정치인 박근혜’의 위치는 이제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해졌다. 그의 그런 위치가 원 없이 확인된 것이 이번 18대 총선이었다. 그 자신 88.6%라는 몰표로 당선된 것은 물론, ‘박근혜’ 꼬리표를 달았다 하면 대부분이 승리를 거둬 ‘박근혜 선거’라는 말이 나돌았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한순간에 등 돌리기를 서슴지 않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노련한 정치인들이 ‘친박’을 간판으로 줄을 서는 이유는 하나이다. 박근혜 가는 곳에 표가 몰리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힘’이다.
박근혜는 정치인에 앞서 대중적 스타라는 것이 한국에서의 평가이다.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여전히 그의 인기의 핵심은 ‘박정희’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지난 10년 정치 무대에서 그는 지지자들에게 상당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정치적 위기 때마다 개인적으로 손해를 볼망정 원칙을 지킨다는 인상이 깊어진 덕분이다.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 때 억울할 만도 한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대선 중 이명박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모습 등은 “한국 정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찬사까지 불러왔다.
아울러 언제 봐도 흐트러짐 없는 절제된 언행, 단정하고 강인한 이미지는 지지층을 확고하게 붙잡는 인기 비결이 되고 있다. 그를 직접 만난 사람들은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 단 한번도 자세를 고치지 않는 꼿꼿한 모습,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상대방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태도에 모두가 감탄을 한다고 한다.
시작은 ‘아버지’였지만 박 의원은 이제 그 스스로 중요한 정치인이 되어 있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은 이제 여성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정치인 박근혜’에게는 숙제가 있다. ‘아버지’를 뛰어 넘는 일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을 갖는 일이다. 공인의 팔은 안으로 굽을 권리가 없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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