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요즘 아내 입장을 대변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민주당 내에서 날로 거세지는 힐러리 용퇴 여론을 막아내는 바람막이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듯하다. 사퇴를 요구하는 당 지도부 인사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쏘아 붙이더니 이번 주에는 힐러리가 8월 전당대회 전에 사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또 한 번 못 박고 나섰다. 반면 경선에서 조금 앞서고 있는 버락 오바마는 “힐러리의 사퇴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나섰다. 속마음까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데도 말이다.
지금 민주당 대선후보들 사이에서는 고도의 심리전이 벌어지고 있다. 힐러리 진영은 ‘절대 사퇴 불가’라는 입장을 반복함으로써 부당한 사퇴 압력에 내몰리고 있다는 ‘희생자 이미지’를 노리고 있다. 또 오바마는 오바마 대로 자신이 당내 여러 인사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사퇴 압력의 배후로 비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수를 치고 있다.
양측의 속셈이 무엇이든 경선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민주당 지도부의 속은 날로 타들어 가고 있다. 상대인 공화당 잔 매케인은 후보 결정전에서 일찌감치 KO승을 거두고 본선에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고 있는데 반해 민주당 후보들은 12라운드 경기 중 이제 9라운드를 마쳤을 뿐이다.
난타전을 벌이다 보니 여기저기 상처가 심하고 체력도 많이 바닥난 상태이다. 그렇게 많던 자금은 당내 경선을 치르느라 소진되고 있으며 두 후보 간 비방은 공화당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캠페인 소재까지 제공하고 있다. 잽을 지나치게 많이 주고받다 보면 겉은 멀쩡해 보여도 골병이 들게 돼 있다. 이것이 심해지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힘들어 진다. 모처럼 찾아왔다 싶은 집권 기회에 쾌재를 부르던 민주당 지도부가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민주당 인사들이 우려하는 것은 집안 식구들 간의 균열이다. 이미 갈등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양측 지지자들 간의 감정적 균열이 물리적 충돌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민주당 유권자들의 여론을 들여다보니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경우 11월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5명중 1명꼴이다.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은 양당체제가 뿌리 깊은 국가이다. 골수 민주당 지지자와 공화당 지지자를 축으로 약간의 부동층이 항상 선거 판세를 결정한다. 그래서 가장 무능한 대통령의 하나로 꼽히는 조지 W. 부시조차도 30%의 지지층은 가지고 있다. 한국처럼 대통령과 정당의 지지도가 90%에서 10%대까지 널뛰는 나라가 아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의 자당후보 외면 조짐은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여론대로라면 민주당 유권자 10명 가운데 1명은 11월 본선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겠다는 말이다. 공화당 후보를 찍는 적극적 이탈행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투표를 하지 않는 소극적 사보타지가 될 가능성은 높다. 지금은 이 정도지만 날선 공방이 8월까지 지속될 경우 균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단 몇% 포인트로 대권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지지층 이탈은 필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4년 대선에서 부시와 민주당 잔 케리의 득표율은 51대49로 겨우 2%포인트 차이였다.
한국 총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실세로 꼽히는 한 현역의원이 서울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다. 당내 공천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자 일부가 고개를 돌리자 당선을 걱정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 됐다. 전통적 지지층의 외면은 종종 두 배의 손실을 의미한다. 집안 식구의 외면은 그만큼 스윙효과가 큰 법이다.
몸이 달아 오른 민주당 지도부는 하루라도 빨리 후보를 결정하기 위해 온갖 묘수와 절충안을 짜내고 있다. 사퇴 공방 속에 앨 고어 추대론까지 나오고 있다. 아이디어는 백태이지만 우려는 한 가지이다. 균열이 더 커졌다가는 집권이 물 건너 가 버릴지 모른다는 절박감이다.
지금으로선 후보들의 결단을 기대하며 그들의 입만 바라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결단을 내리는 일은 약을 쓰는 일과 같아서 시점을 놓치면 약효가 떨어진다. 서로 간에 할퀼 것 다 할퀸 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라면 감동과 분열 봉합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달 펜실베니아와 다음 달 노스캐롤라이나 예선을 거치면서 형성될 여론이 관건이다.
민주당은 그동안 예선 흥행으로 상당한 재미를 봤다. 그러나 이제는 흥행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는 시점을 지나고 있다. 흥행이 될수록 본선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는 ‘승률 체증의 법칙’이 아니라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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