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중반인 대학 선배 한분이 몇 년 전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불쾌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한국여행객 대상 선물점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데 옆에서 누군가가 자꾸 ‘아버님’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아버님, 이건 어떠세요. 아버님, 저건 지금 세일 품목이에요… 아버님 …”
돌아보니 젊은 여종업원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던 것이었다. 생각도 못한 ‘아버님’ 호칭에 당황한 그 선배는 “여보쇼, 내가 어째서 당신 아버님이요?”하고 말을 막았지만 불쾌한 기분은 한동안 가시지 않더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그 선배는 60이 채 못 된 나이에, 마음은 그 종업원 또래를 데이트 상대로 여길 만큼 ‘청춘’인데 그런 여성에게서 ‘아버님’ 소리를 들었으니 보통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의 일’로만 여겼던 그 일이 며칠 전 내 눈앞에서도 일어났다. 60 갓 넘은 한 여자 선배와 점심 식사를 하러 갔을 때였다. 한인이 운영하는 퓨전 일식집이었다. 식당의 매니저인 듯한 깔끔한 외모의 여성이 더 할 나위 없이 상냥한 태도로 주문을 받았다. 그리고는 마무리하듯 한마디를 보탰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어머니?”
뜻밖의 호칭에 놀란 우리는 응대할 수도 없고 못 들은 척할 수도 없어 겸연쩍게 웃고 말았는데, 그 여성은 공손하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 이후에도 ‘어머니’를 되풀이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주위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한인업소에서 고객을 ‘어머니’‘아버지’로 부르는 일은 언제부터인가 꽤 흔해 졌다. 어머니·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세상에 한분뿐인 지극히 귀한 존재인데, 그 존재의 호칭이 왜 이렇게 남발되고 있는 것일까.
발단은 물론 한국이다. 한국의 한 노년 전문가가 쓴 책의 한 구절이다.
“아버님은 올해 결혼 63주년을 맞으신다고 하셨다. 병원에 계시는 사모님이 하루 빨리 회복하셔서 두분이 63년 된 우정을 앞으로도 오래오래 나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든여덟 내 친구인 아버님이 내게도 더 많은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그냥 읽어서는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아버님’의 부인이 왜 ‘사모님’인지 ‘아버님’이 왜 ‘친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해답은 책의 앞부분에 있었다. 노인복지관에서 일한 저자는 복지관의 노인들이 ‘할머니’‘할아버지’로 불리는 걸 싫어해서 나이든 느낌이 덜한 ‘어머님’‘아버님’이란 호칭을 쓴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 같은 데서는 60세 이상 환자에 대해 ‘어르신’ 혹은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쓰라고 직원들에게 매너 교육까지 시키고 있다. 이렇게 여기저기서 ‘어머님’‘아버님’ 호칭이 쓰이다보니 이제는 나이와 무관하게 연장자다 싶으면 ‘어머님’‘아버님’을 남용, 20대 후반 남자 세일즈맨이 마흔 살 노처녀에게 ‘어머님’ 호칭을 쓸 정도라고 한다. 물론 그 여성은 그 업소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것이다.
호칭은 중요한 매너이다. 매너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아버님’‘어머님’은 이제 연장자 공경의 상징처럼 굳어졌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길어진 평균 수명, 여성의 사회진출, 달라진 결혼관 등 사회 전반의 변화가 변수이다.
요즘 50·60대는 옛날의 ‘환갑노인’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과거보다 10년은 젊어졌다. 아직 노년이 실감나지 않는 그들에게 ‘어머님’‘아버님’은 기분 상하게 하기 딱 좋은 호칭이다.
아울러 일정 나이 이상이면 무조건 여성은 ‘어머니’이던 시대는 지났다. 미혼인 경우도 있고,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전문직에 오래 종사한 여성들은 직업 관련 호칭에 익숙해서 ‘아줌마’나 ‘어머니’는 몹시 생경하고 종종 불쾌하다.
한인업소들이 고객을 부르는 호칭에 신경을 좀 써야 하겠다. 나이 들었다 싶으면 무조건 ‘어머님’‘아버님’으로 ‘공경’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다. 상대방의 젊은 기분을 부추기느라 무작정 ‘언니’‘오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불려서 흐뭇해할 고객들에만 제한적으로 쓰는 것이 센스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고객은 가장 정확한 본래의 호칭을 쓰면 될 일이다. ‘손님’ 혹은 ‘고객님’이다. 바른 표현을 두고 굳이 잘못된 호칭을 쓰면서 손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무엇인가.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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