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흑인 배우 포레스트 위태커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The Last King of Scotland)은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그린 영화다. 영화 속에서 아민은 기행을 일삼으며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인간 도살자로 그려진다.
아민은 수십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단 한 명의 아들만이 현재 우간다에 살고 있는데 USA 투데이지는 영화 개봉 후 이 아들을 인터뷰했다. 그런데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아민은 영화 속 독재자 아민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에게 이디 아민은 격무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놀아주던 다정다감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잔학함과 관련한 어떤 흔적이나 기억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민의 두 얼굴이 극단적으로 대비되긴 해도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 원래 하덕규가 부르고 조성모가 리메이크한 노래 ‘가시나무’가 히트한 것은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로 시작되는 가사가 그 만큼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 안에는 ‘감추고 싶은 나’ 그리고 ‘나도 잘 모르는 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이런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너무도 다른 얼굴들을 보여준 인물들이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이다.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자본가들의 수탈행위와 노동자들의 피착취를 연구해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그는 영국 자본가들보다도 더 심하게 하인들을 착취했다. 그의 집에는 렌첸이라는 이름의 보모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르크스 집안을 위해 죽을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마르크스에게서 단 한 푼의 동전도 받지 못했다.
또 종교와 도덕에 관한 작품을 무수히 집필했던 톨스토이가 죄의식 없이 무시로 사창가를 출입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중들에게 고매한 말을 하면서 행동은 고매하지 못했던 유명인들의 사례를 들자면 끝도 없다.
성매매와 검은 돈 등 월가의 부적절한 관행을 파헤쳐 ‘월가의 저승사자’란 별명을 얻었던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지사가 성매매 추문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스피처의 몰락을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인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여러 얼굴의 존재이다.
스피처 스캔들이 터지면서 정치인, 종교인 등 지도급 인사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부도덕한 행태에 대한 심리적 분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정치인들 가운데는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스릴(thrill)을 추구하는 ‘T 타입’ 성격이 흔하다는 설명에서부터 남성의 바람기는 진화론적 성향의 표출이라는 이론까지 분석도 다양하다. 또 이들의 행위가 ‘위선’인지, 아니면 위선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저지르는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분분하다.
이같은 이론적 분석들의 타당성을 떠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나친 부정과 거부는 종종 집착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이다. 강단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던 목사가 동성애에 빠지고 가족의 가치 어쩌고 하면서 근엄을 떨던 정치인이 추문에 연루되는 것은 이런 관찰을 뒷받침해 준다.
이런 인간의 마음을 일찌감치 읽어냈던 사상가는 장자였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장자는 재가를 하기 위해 죽은 남편의 뗏장을 말리던 여인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줬다. 그러자 장자의 아내는 눈을 치켜뜨고 그 여인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다. 장자는 아내의 정절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았다. 성형미인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난의 소리를 높이는 여성이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다.
한 작가는 예수가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간음한 여인을 치라고 했던 성경의 사건을 예로 들어 “만약 현대 사회에서 이 같은 일이 다시 재연된다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겠다며 돌을 들어 여인을 내리쳤을 것”이라며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고 있다.
마음속의 욕구와 유약함, 죄의식은 근엄함과 필요 이상의 비난으로 포장되곤 한다. 다른 이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비난이 자신의 욕구와 집착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닌지, 스피처의 몰락을 보면서 모두가 한번쯤은 자문해 봤으면 한다.
너무 근엄한 척 하지 말자. 그리고 남 비판하고 흉보는데 핏대 세우거나 침 튀기지 말자. 자칫 그 그물에 스스로 걸려들까 염려되니 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