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현(컬럼니스트)
예로부터 천재지변이나 커다란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꼭 그 전조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점성학자들을 동원해 그것을 사전에 알아서 길흉을 예견해 길조가 보이면 감사제를 드리고 흉조가 보이면 액막이 제사를 드리곤 했다. 신라시대 첨성대부터 조선시대 원구단과 사직단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왕실에서 주관하는 중요한 관례였다.
한국의 국보 1호 숭례문이 소실됐다. 600년 조선왕도 한양의 관문이며, 서울의 얼굴로 늘 같이 있어서 귀한 줄도 몰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을 지켜보며 버텨온 얼굴이 한 국민과 한 시대의 광기에 휩쓸려 불타버렸다. 이제 취임식을 갖고 출범하는 새 정부는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겸허한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숭례문이 불타버린 것이 한 광인이 저지른 우연하고 돌발적인 사건인지, 한 시대의 문제를 내포하는 상징적 사건인지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국보 1호’가 불타버렸다는 엄청난 범죄의 충격 속에서 그 방화범이 표출하고자 했던 주장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그냥 간과해서는 안된다.
범인은 체포되었고 자신의 범행을 인정했다. 범행의 동기가 자신의 토지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하고 건설업자에게 빼앗겼으며 이를 보상받기 위해 관청 등 여러 곳에 진정했으나 자기의 부당한 피해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저지르게 됐다는 것이다.
개인의 불만을 이유로 문화재를 소실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숭례문 방화의 시점이 대통령 임기 말의 정권교체 시점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사고라기 보다는 ‘시대의 상징적 사건’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이른바 ‘참여정부’를 구호로 진보정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의 최종평가를 보는 느낌이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공식적으로 주장하는대로 그 자신과 당이 ‘진짜 좌파 정부’였던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포퓰리즘의 환호 속에서 아마추어 원리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기만하던 ‘자칭 좌파’로 볼 수 밖에 없다.
말과 구호가 아니라 5년간 정치경제적 결과들이 그 정부의 정치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의 치세기간 각종 경기지표와 경제수치는 상승곡선을 탔다. 그러나 서민들의 실제 체감경기는 늘 어려웠다. 실업률은 줄어들지 않았고, 주택 보급률은 늘어나지 않았다.
결혼연령은 높아졌고 이혼율과 자살률은 늘어났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됐고 전세값과 생필품의 값은 올랐다. 아파트의 값은 두 배 이상 올랐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서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일해도 아파트를 장만할 수 없는 수치가 됐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50% 이상
차지하게 된 것은 대한민국 경제사에 없었던 일이다. 물론 모든 것의 책임을 노무현 정부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스스로 ‘좌파 정부’라고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얘기다.
‘좌파’라고 표현하는 진보정치의 요체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착취와 인간 소외를 시정해서 비인간화를 최소한으로 줄이는데 있다. 그런데 이번에 숭례문 방화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방화범의 주장대로라면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 ‘약자에 대한 강자의 수탈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화범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의 억울함을 각처에 호소했으나 약자인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관청이나 기관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칭 좌파 정부’인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치세에서는 인권과 민생에 관한 정치적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진정으로 그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지 못하고 말로만 개혁과 진보를 표방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번 숭례문 방화사건을 계기로 곧 대통령에 취임하게 될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앞으로 5년 동안 과연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이 연구하고 실천할 것을 기대한다.대한민국의 국체(國體)는 ‘민주주의’이지 보수나 진보가 아니다. 새 정부는 숭례문 방화사건을 ‘상징적 사건’으로 인식해 그 숭례문이 우리의 얼굴로 다시 재건되는 기간 동안 정관경(政官經) 유착의 구조적 비리 체제를 완전 개혁하고 국민 전체의 각종 ‘행복지수’들을 진보시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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