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지난 반세기 동안 쿠바를 통치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지난 19일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멋진 턱수염과 군복차림의 훤칠한 키에 시가를 물고 있는 그는 냉전시대에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1959년 혁명으로 집권하여 49년간 권력을 잡고 있었으니 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집권자였다. 미국의 바로 코앞에서 미국을 괴롭혀서 더욱 유명했던 그가 이제 권좌에서 물러나니 인생과 세상의 변화에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젊은 변호사였던 카스트로는 미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군부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전개한 끝에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미국을 비롯한 외국 자본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을 제창했다. 1961년 미국 CIA 지원으로 반 카스트로 쿠바인들이 일으킨 피그만사건 이후 그는 사회주의 체제를 본격화하고 친소정책을 확고히 하여 유명한 미사일 사건을 일으켰다.이로 인해 카스트로는 미국과 앙숙관계가 되었다. 미제 타도를 외친 선봉장이 된 그는 미국의
봉쇄조치에 맞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 교류하였으나 1980년대 말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국제적 고립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1977년에 미국과 외교관계를 재개했으나 그 후에도 협조관계와 적대관계가 거듭되었다.
카스트로가 독재정치를 강화하여 반대자들을 체포 처형하고 앙골라 파병 등 아프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내전에 관여할 때마다 미국은 경제제재 조치로 압박했다.쿠바의 경제상태는 지금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 한달 임금이 18달러이니 몇 군데 일자리에서 일을 하거나 물건을 훔쳐야 살 수 있다고 한다. 배급소에서 주는 쌀이나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한데 자유시장에도 물건이 없어 빵값이 배급소의 13배나 된다고 한다. 한국의 50년대나 60년 초반처럼 길거리에는 혁명구호가 나부끼고 있으나 사람들의 얼굴은 찌들어 있다. 쿠바는 담배와 사탕수수로 유명하며 자원도 풍부하다. 날씨마저 겨울에는 섭씨 22도, 여름에는 28도로 온화하다.
경제개발을 잘 해서 살림살이만 넉넉했더라면 쿠바는 지상낙원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카스트로의 영웅적인 고립주의가 이 낙원을 지옥처럼 만들어 놓았다.카스트로의 권좌를 승계할 것으로 보이는 그의 동생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것이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개방정책을 취하고 특히 미국과 관계개선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쿠바가 앞으로 중국식 개방정책을 취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도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가 개혁과 개방정책을 취해 관계개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카스트로의 잃어버린 50년을 뒤늦게나마 되찾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스트로가 지배한 쿠바와 북한은 매우 흡사한 점이 많다. 북한의 김일성은 카스트로와 쌍벽을 이루었던 공산권의 장기 집권자였고 지금의 김정일을 김일성 지배의 연장이라고 본다면 카스트로보다도 더 장기 집권인 셈이다. 철저한 반미주의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나 경제난에 허덕인 것도 비슷하다. 쿠바가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대치했던 것처럼 북한이 핵개발로 미국과 대치한 것이 비슷했고 그 후 쿠바가 미국과 수교한 것처럼 북한이 대미 수교를 추구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쿠바가 미국과 국교를 재개한 후에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제제재 조치로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북한이 핵문제를 매듭짓고 대미수교를 한다고 해도 북한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즉 미국이 수교 후 더욱 강하게 제기할 것으로 보이는 인권문제, 민주화문제, 인적 물적 개방문제라는 어려운 고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으로 인해 북한의 경제난이 더욱 악화된 상태에서 정권이 교체될 경우 지금의 쿠바처럼 개방화 추세를 맞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능력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조그마한 힘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조그마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큰 권력이나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남을 크게 도울 수도 있다. 심지어는 독재권력도 잘 사용한다면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과거 박정희 독재가 한국의 경제 개발을 이룩한 것이 좋은 예이다. 북한의 김정일이 카스트로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쿠바를 반면교사로 삼아 획기적인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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