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고 며칠이 지난 후, 크리스마스트리를 걷었다. 트리 밑에는 아직까지 선택 받지 못한 2개의 선물이 목을 길게 늘이고 주인을 기다린다. 포장의 장식도 헐거워지고 지친 모습이 누구의 품이던 안기고 싶어 하는 눈치이다. 나는 선물을 집어 들고 “자, 이제는 네 주인을 찾아 떠나거라.” 한 번씩 뺨을 댄 후, 누런 소포용 포장지를 꺼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12월이 되면 손을 꼽아가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 착한 아이에게만 준다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면서. 평소 아이들이 가지고 싶어 하던 선물을 준비할 때에는 받는 아이보다 준비하는 내 마음이 더 기쁘고 설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이들과 함께 쿠키를 굽고 과일로 눈사람을 만들어 식탁에 세우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물의 포장을 뜯으며 놀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그때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에 함박웃음이 꽃피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이브의 만찬은 우리 가정의 오랜 전통행사였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작은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는 만찬으로 하지 말고 오찬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낮에 다녀가겠다는 이야기인데 24일이 평일이기에 오찬 시간대에는 남편과 큰아들 내외가 참석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만찬을 나누고 처가인 요바린다에서 정초까지 머무는 것이 작은 아들네 행사이다. 이번에는 처가에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갑작스럽게 나온 오찬 이야기로 보아 결국 참여할 수 없다는 간접 화법 같았다.
“아들-, 낮에 너희 식구를 위해 오찬을 준비하고 저녁에 만찬을 준비한다면 엄마가 너무 힘들지 않겠니. 식구들이 다 모이는 저녁에 잠시 얼굴만이라도 보이고 가렴. 명절 때는 시댁이 우선이라는 걸 미국 며느리는 모르는 것 같구나.”
전화기 속에서 아들의 폭소가 귓가를 넘어온 집안을 울린다.
“엄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편리한 대로 하는 거지.”
어려서 한국을 떠났기에 시댁과 친정이 뭔지도 모르는 아들은 그 말에 담긴 내 심정까지는 모르는 것 같다. 아들은 오히려 나를 배려 없는 엄마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설득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한동안 들은 후에 나는 아들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큰아들 내외와 지내면 되지 애초에 흔쾌하게 허락해 줄 걸, 하는 후회의 마음이 이는데도 가슴 속에서는 한 줄기 찬바람이 휑하니 스치고 지나간다. 아들은 결국 우리 집 근처의 프리웨이를 지나야 처가엘 가건만 갈 때는 물론 올 때에도 잠시 들르지 않고 며칠 후에 우리 내외의 선물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샌타바바라에 사는 작은 아들네서 우리 집까지는 100여마일 정도여서 마음만 먹으면 가끔씩 주말에 다니러 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집보다 더 멀리에 살고 있는 처가에는 자주 들르는 것을 느끼며 ‘장가를 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들은 대학으로 가면서 집을 완전히 떠나 샌타바바라 맨이 되었으니 늘 내 영역 밖에 있었다. 샌타바바라 대학보다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이 동부에 있어 가까운 친지가 소개했다가 그도 나도 졸지에 돈 좋아하는 사람으로 몰리고 말았다.
어느 날, 아들에게서 카드가 왔다. ‘엄마, 마태복음 5, 6, 7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라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산상보훈에 있는 말씀을 예로 들며 조금 나은 환경에서 일하자고 친구들과 오랫동안 정든 곳, 온갖 추억이 서려 있는 샌타바바라를 떠나란 말이냐는 무언의 항변이었다. 아들의 말이 옳았다. 나도 물질을 떠난 정신적 삶의 추구를 누구보다 원하면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데도, 자식에 대한 일이니 더 나은 조건이 구미에 당겼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들들이 직장을 구하는 문제나 대학 진학 때에도 본인들이 원하는 곳으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물음에 대한 방향제시만 했을 뿐인데도 작은아들에게 돈 좋아하는 엄마로 몰려 그 부분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좀 억울한 심정이다.
큰아들은 대학 진학 문제나 직장 문제를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편하게 해주셨기에 오히려 더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게 되더라고 그 부분을 감사했다. 두 살 터울 형제인데도 세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요즈음 세태를 풍자한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아들 시리즈>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얼빠진 여자> 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오죽해야 이런 말들이 생겨났을까 하고 웃다가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는 며느리의 남편을 내 아들로 착각하며 살고 있나 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작은아들 내외를 보며, 자식은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고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시던 친정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어머니도 우리 형제들이 뭔가를 서운하게 해드렸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으련만 우리들은 전혀 어머니 말씀을 의미 있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의 부모님 마음이 되어 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으니 인간은 후회와 반성을 반복하며 살게 되는 것인가 보다. 내 아들도 먼 훗날 지금의 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 친가를 멀리하던 처가엘 자주 가던 너희들 편한 대로 하려무나. 너희가 행복하고 편안하면, 군말 없이 잘 살면 그것이 효도다.
나는 애써 섭섭함을 삭이며 마지막 남은 두개의 선물을 정성껏 포장했다. 그래, 사랑은 내리사랑이야 내리사랑, 나는 우체국으로 가면서 “내리사랑”을 계속 중얼거렸다.
<유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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