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우리가 한국에서 살 때는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한국말로 대화를 하다가도 무심결에 영어가 섞여 나온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단어나 영어로 짧게 말하는 것이 더 편리할 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도 혀 꼬부라진 원어발음으로 한다. 영어를 하는 나라에 살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에서도 일상 대화에서 이렇게 영어를 쓰고 있는 것 같다. TV 드라마를 보면 대사 중에 가끔 영어단어가 튀어나오고 어떤 때는 영어 대사가 나온다. 물론 한글 자막은 없다. 그러니 영어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TV 드라마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세계어인 영어가 한국사람들의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든 결과 우리말의 사용이 점점 줄어드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 뉴욕주를 엠파이어 스테이트, 뉴저지주를 가든 스테이트라고 각 주를 상징적으로 표시하듯이 한국의 지자체에서도 상징적 용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이 모두 영어이다. 예를 들어 Hi 서울, It’s 대전, Heart of Korea 충청남도, Fly 인천, Your Partner 광주, Pride 경북, Feel 경남, Dynamic 부산, 울산 For You 등으로 되어 있다. 공무원의 명함에도 이 영어 로고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또 한국에서는 치안센터, 안전센터, 심부름센터 등 센터를 좋아하는데 이제는 지역 주민의 행정업무와 민원을 담당하는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사무소를 왜 센터로 바꾼지는 이해할 수 없다. 시골 사람들이 사무소라면 잘 알겠지만 센터라고 하면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중국에서는 센터를 ‘중심’으로 번역하여 비즈니스 센터를 업무중심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사는 중국인들도 센터를 중심이라고 쓰고 있으니 한국과는 반대 현상이다.이렇게 영어 위주가 되다보니 한국에서는 영어교육열이 지나칠 정도가 되었다. 언어는 조기교육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아기가 엄마, 아빠를 겨우 부르기 시작할 때부터 영어교육이 시작된다.
부유층 가정에서는 이 때부터 원어민 영어 가정교사를 붙여서 영어를 가르친다. 이 때문에 유아기의 아이들이 우리말 보다 영어를 먼저 배우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교를 거치면서 부유층 자녀들은 영어 과외공부를 하고 영어권 국가에 조기 유학을 간다. 이 때문에 엄청난 사교육비가 들고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빈곤층 자녀들은 영어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해 새 정부가 영어교육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영어의 공교육을 강화하여 2010년부터는 초등학교 3,4학년과 중 3, 고 1학년은 영어시간을 영어로만 교육하며 2012년부터는 초중고의 영어시간을 대폭 늘리고 수업을 모두 영어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영어시간만은 미국과 똑같은 바야흐로 영어시대가 되는 셈이다.
미국에 이민온 1세 부모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이 한이 되어 자녀들에게 집에서도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영어만을 쓰게한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자녀들이 영어는 유창하지만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게 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처럼 언어 교육이 한쪽으로 너무 지나치면 다른 한쪽이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에만 집중하여 한국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한국말을 더듬거린다고 상상해 보자.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까.
언어는 민족의 정체성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를 하기 때문에 한국인인 것이다. 우리 이민자들이 한국어를 하면서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은 영어나라에 사는 이민자로서 경계선상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일본국어정책을 폈던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세계화의 시대에 영어는 경쟁력이므로 영어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말을 소홀히 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북한처럼 우리말에 없는 외래어나 전문용어를 억지로 우리말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 표현을 억지로 영어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어의 범람으로 상대적으로 한국어가 위축되고 있는 이 때 우리말을 가꾸고 다듬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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