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근대 경제학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쓴 애덤 스미스는 일개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철학과 윤리, 법,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걸출한 학식을 겸비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국부론을 발간하기 17년 전인 1759년 ‘도덕 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도덕 감정론’에서 스미스는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의 정신적·도덕적 조건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인간이 도덕적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며 이것을 ‘연민’(sympathy)이라고 불렀다. 이런 감정은 이성이 아닌 본성의 산물로, 인간이 규칙적이고 유익한 사회조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본성적으로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도록 지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필요에 반응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양심이 없는 이기, 정의가 빠진 경제는 온전할 수 없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스미스는 ‘국부론’을 통해 개개인의 이기적 동기를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을 편 학자이다. 그런 점에서 ‘연민’에 대한 그의 주장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타적 유전자’의 존재를 인정한 ‘도덕 감정론’은 그것이 사회에 던지고 있는 질문 자체만으로도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 또 실제로 ‘도덕 감정론’은 책이 발간됐을 당시보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이 지난 24일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행한 연설이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이츠는 연설에서 “자본주의가 부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면서 하루 1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아가는 전 세계 20억 빈민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고 역설했다. 게이츠는 자신의 제안을 ‘창조적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게이츠의 제안은 즉간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빈민국에 대한 지원이 실제적으로 별 효과가 없다는 반박에서부터 “이제 와 그런 주장을 펴는 게이츠는 그럼 그동안 어디 있었는가”라는, 다분히 인신공격적인 공박도 나온다. 게이츠가 지나친 낙관주의자인지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는 비저너리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의 ‘창조적 자본주의’ 구상이 꾸준한 독서, 특히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 의해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게이츠는 스미스의 ‘국부론’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가 최선의 제도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사상가의 ‘도덕 감정론’을 들어 자신이 내놓은 제안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미국의 대기업 CEO들은 게이츠처럼 대부분이 책벌레이다. 몇 달 전 뉴욕타임스는 무엇이 CEO들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는가, 그 원동력을 진단하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기사가 찾아낸 성공의 열쇠는 그들의 개인 서가였다. 뉴욕타임스가 이들의 서가에 어떤 책들이 있는가 들여다봤더니 경영과 경제 관련 서적은 별로 없고 온통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 서적들이었다. 이들은 서가에서 책을 펴들면서 생각의 뼈대에 살을 입히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혜를 구하고 있었다.
구글과 유튜브 등에 투자해 15억달러의 재산을 형성한 벤처 캐피털리스트 마이클 모리츠를 그의 아내는 ‘책의 이멜다 마르코스’라고 놀린다. 책을 엄청나게 구입하는 모리츠를 옷과 구두 등 호사스런 물품을 사쟀던 이멜다의 병적인 수집벽에 빗대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모리츠가 가장 자주 펴 보는 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지은 ‘지혜의 일곱 기둥’이다. 이 책은 물론 경영서적이 아니다.
고급 사운드 시스템 등을 생산해 연 30억달러 매출을 올리는 ‘하먼 인더스트리’의 CEO 시드니 하먼은 고전 시를 애독한다. 평소 시인이 최고경영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해 온 그는 이미 ‘준 시인’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의 공장은 근로자 친화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하먼은 근로자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철학을 셰익스피어와 테니슨, 그리고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등에 나오는 시를 통해 형성했다고 밝힌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세계적인 CEO들의 독서습관을 보면서 작은 CEO가 되는 것은 경영기법만으로도 가능한 일일지 몰라도 인간에 대한 통찰과 애정 없이 큰 CEO가 되기는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전을 펴 든 채 서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큰 CEO들의 모습 위에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과 재산 불리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CEO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CEO들의 위상을 고려할 때 이들의 소신과 철학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국가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 게이츠 같은 경우는 지구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책을 가까이 하는 CEO가 많은 사회는 그만큼 정신적 성숙도가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말 한마디, 연설 한번으로 즉각 거대한 사회 경제적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적 자본가’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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