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섬기다’라는 말은 윗사람이나 웃어른을 모시고 받든다는 의미이다. 가장 흔히 쓰이기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고 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기고 조상의 제사를 섬기는 일 등이다. 봉건군주 시대에는 신하가 군주를 섬겼고 무사가 영주를 섬겼으며 종이 주인을 섬겼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사람이 신을 섬기는 것이 지고의 선이다.
섬기는 것은 섬김을 받는 사람의 뜻에 맞게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를 섬기는 신하가 아무리 좋은 의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군주를 따르게 할 수는 없다. 신하는 그의 직위와 봉록이 모두 군주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시대인 요즘은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이 있다. 돈을 내고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욕구에 맞게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대선 이후 섬기는 리더십이 화제로 등장했다. 이명박 당선자의 첫 마디가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고 그의 뜻에 따라서 정권인수위원장도 섬기는 리더십을 구현하겠다고 했다. 대선에서 참패한 신당과 이회창 후보도 모두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바야흐로 국민을 모시고 받드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국민은 섬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가. 과거 봉건왕조시대의 국민이라면 섬김은커녕 착취와 학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는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은 국민들이 세운 것이며 모든 정치인과 공직자의 급료는 국민이 낸 세금에서 받는다. 그러므로 공직과 공직자의 주인은 국민이고 공직자는 국민의 종, 즉 공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공직자는 마땅히 국민을 섬겨야 한다.
지금도 어떤 곳에는 국민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집권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와 조직에는 이같은 섬김의 원리가 있다. 과거에는 아래서 위를 섬겼으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 위상이 뒤바뀌었다. 지금은 어떤 단체의 장이 구성원에게 명령을 하거나 위세를 부릴 수 없으며 오히려 회원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한다. 아직도 어떤 종교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신도의 위에서 군림하는데 매우 잘못된 일이다. 신도가 있기 때문에 지도자의 몫이 있으므로 신도를 섬기는 것이 본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섬겨야 할 사람이 섬기지 않고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파멸밖에 없다. 사람이 신을 섬기지 않고 신의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고객을 왕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결국 그 장사는 망하게 될 것이다. 국민을 섬겨야 하는 정부가 국민을 졸로 보고 군림한다면 그 국민의 손에 의해 붕괴하게 될 것이다.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는 사람보다 인격이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섬기는 것만은 아니다.
군왕을 섬기는 신하가 군왕보다 더 훌륭한 경우도 있으며 부모를 섬기는 자식이 부모보다 월등히 훌륭할 수도 있다. 일찍이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줌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을 지극히 섬긴다면 그 훌륭함이 배가 될 것이다.
합리적 사고가 지배하는 미국인들에게는 섬기는 문화가 없다. 모든 인간관계가 주고받는 일(Give and Take)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한 만큼 보수를 받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공직은 법에 따라 맡고 법에 어긋나지 않게 직을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섬김의 문화가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이 주인인 이상 국민을 섬기는 정치를 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리더십은 군림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데서 나온다. 즉 섬김의 리더십이다. 지금 새 정부가 말하는 섬기는 정치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링컨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을 한다면 국민은 그 리더십에 기꺼이 따를 것이다. 정치에서 섬기는 리더십이 성공한다면 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산될 것이다. 새 정부가 지금 말한 대로 초심을 잃지 않고 5년 동안 초지일관한다면 경제도 살리고 정치도 살릴 수 있다. 이 기대를 절대로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기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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