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전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왜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조선에도 알려졌다. 그래서 당시 임금 선조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실 여부를 알아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결국 전쟁 대비는 충분치 못했고, 조선은 그 결과를 길고 혹독하게 치루고 만다.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기에 국방정책을 펼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청나라 조정에서는 북쪽의 러시아를 막는 데 더 힘을 써야할지, 남쪽 해안을 강화하는 데 더 경비를 써야 할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결국 러시아를 막는 데 훨씬 더 많은 돈을 썼다. 그리고는 남쪽으로부터 올라온 영국과 프랑스에게 크게 패하고, 왕조의 멸망에까지 이르고 만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바보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정보가 부족했을까? 아마 가장 가까운 대답은 ‘이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다’일 것이다.
적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은 한 번도 한반도에 있는 나라를 상대로 전면전을 걸어왔던 적이 없었다. 물론 고려 말에 왜구가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적은 있었지만, 그것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은 아니었다. 일본에게 그런 정도의 국력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남쪽 해안선을 넘어 온 세력과 국가 대 국가로 싸웠던 적이 없었다. 반면에 러시아와는 전쟁도 했었고, 중국인들은 북쪽 ‘오랑캐’들에게 침략을 당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청나라 자체가 그런 ‘오랑캐’가 세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더구나 지금의 미국이 그렇듯, 19세기 초까지도 청나라는 말 그대로 세계제국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국부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늘날 미국의 그것보다 더 높았다.
20세기 이전 중국과 한국의 왕조시대에는 가장 총명한 사람들이 국가기구로 흡수되고, 거기서 훈련받고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 그들조차 단지 가능성만으로 ‘이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던’ 일에 대해서 막대한 자원을 쓸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판단은 대개 적절했다. 위의 예처럼 나중에 문제가 된 몇 가지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그들은 그 오랜 세월 내린 수많은 판단 중에서 단지 몇 번 잘못했을 뿐이다.
드디어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모두 아는 대로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쟁점은 경제였다. 이번 선거의 당선자는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겠다고 했고, 선거에서 진 여당은 지난 5년 동안 국가 경제는 성장했다고 했다. 어느 쪽 말이 맞을까?
거시경제지표로만 본다면 여권 측의 말이 사실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5%에 못 미칠 것이라는 전망을 놓고 “한국 경제가 역동성을 잃었다”는 비관론을 편다. 연간 경제성장률이 10%에 육박하던 1970~80년대에 견주면 너무 낮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세계 속에서의 위치를 보면 이런 이야기에는 큰 오해가 있다.
외환위기를 맞으며 -6.9% 성장했던 98년을 포함해 2003년까지, 한국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4.17%였다. 이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아일랜드(인구 400만) 룩셈부르크(인구 45만)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98년을 빼고 계산하면 아일랜드에 이어 2위로 올라선다. 한국보다 GDP 성장률이 높은 나라는 적도기니(16%), 앙골라(11.9%), 수단(8.3%), 알제리(8.2%), 중국(8.1%) 같은 나라들이다. 세계의 어느 경제전문가도 한국을 인구 50만의 아프리카 서부 국가 적도기니, 1인당 국민소득이 2천 달러도 안 되는 중국 같은 나라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일본이 미국 시장을 석권해 가던 70∼80년대에도,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5% 정도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가 문제라는 새 당선자의 주장에 표로 동의했다. 그 핵심에는 지난 10년 동안 세계적으로 진행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있다. 나라와 대기업들의 경제는 좋아졌다고 하는데, 내 지갑은 점점 얇아지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성공했던 과거의 경험은 버리기 어려운 법이다. 상황이 불확실할 때는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또 한 번의 고도성장을 약속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문제는 오늘날의 경제 문제 자체가 과거의 그것과 같은 성질의 것인지, 아닌지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의 결과는 그것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 셈이 되었다. 한국민 모두는 지난 40여 년의 경제적 성공의 경험, 그 ‘익숙했던 것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5년이 지나면 그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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