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과 같이 나란히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나간 나의 생애의 전부가 이 시련을 준비하기 위해 있었다고 생각됐다.”
전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 2차 대전 초, 윈스턴 처칠은 어느 날 국왕의 부름을 받는다. 새로 수상에 지명돼 조각을 위촉 받은 것이다. ‘그 때 그 순간’에 대한 처칠의 회고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은 종종 운명론자가 된다. 왜 그 자리에 부름을 받았나.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한다. 그래도 모를 부문이 있다. 결국 운명론적인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권력을 멀리서 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운명론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한 길이 보이지 않아서다. 퍽 개인적 소회지만 2007년 12월19일 한국에서 실시된 대선 결과에 대한 감회도 그렇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각종 여론조사는 줄곧 이명박 1위로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그 때서야 실감이 든다. 한국의 정치지형이 마침내 바뀌었구나 하는.
동시에 전율 비슷한 것이 흐른다. 네거티브의 엄청난 집중포화다. 그걸 이겨냈다. 그리고 이룩한 권력이동이다. ‘이명박이라는 사람’을 극점으로 한 정권담당 세력의 교체. 거기에서 운명이랄까, 섭리라고 할까, 무언가 그런 것이 엿보이는 것 같아서다.
한국과 미국은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소리가 요란했었다. 군사동맹을 깨라는 얘기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그것도 북한 핵문제로 정상회담차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정일의 입장만 옹호한다.
외쳐대느니 오직 ‘우리 민족끼리’다. 그 가운데 반(反)미는 거침이 없다. 한국의 분위기였다.
미군을 철수시켜라. 미국 내 여론도 빗발 같았다. 반한(反韓), 아니 혐한(嫌韓)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지한파라는 사람들도 등을 돌리는 판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것이나, 6.25동란도 한국이 동맹전략에서 실패한 탓이라는 등의 일침과 함께.
그 시점에 한 에세이가 나왔다. 논자는 데이빗 스코필드다.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한 것이다. 분위기와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이 마당에 도대체 무엇이 동맹의 존속을 가능케 한다는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그 거친 입을 통해 연일 ‘자주’를 쏟아내고 있었다. 통일원장관 정동영은 한국군의 ‘주적 설정’ 문제와 관련된 미국측 논평을 내정간섭이라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그 정황에서 논자는 한국 내 다른 세력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다. 매일같이 반미시위의 격랑이다. 그 가운데 외롭게 거리로 나섰다.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다. 운동은 확산됐다. 미주 한인사회에도 번졌다. 교회가 하나가 돼 한미교회연합(KCC)이 결성됐고 이는 북한주민을 돕는 인권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관련해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한국과 미국의 ‘크리스천 동맹’이다. 그 가치관의 공유, 연대가 군사동맹 와해를 막을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까지 했다. “냉전시대에 한국은 서방의 최전방을 형성했었다. 한국은 오늘날 다시 최전방에 섰다. 종교와 가치관 전쟁이라는 또 다른 세계적 전쟁에서 기독교권의 최전방을 담당하고 있다.”
여전히 좌파 전성시대였다. 한국의 우파는 한 세대동안 광야생활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그러니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야당의 대권주자는 없었다. 범여권의 후계구도만 거론될 뿐.
나중에 복기(復棋)를 해보면 모든 것은 일목요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명박 대세론도 그렇다. 그 때 그 상황에서는 앞이 잘 안 보인다. 암중모색이다. 대세론이 담론화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 동맹’은 일종의 예언으로 들린다.
그 예언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 당선자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거기다가 그 대통령 당선자, 이명박은 가장 미국적 정치인 모델에 가깝다. 본인이 기독교인이다. 거기다가 성공한 CEO 출신이다.
한국과 미국은 진정한 동맹관계로 거듭나야 한다. 대선을 바로 전후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군사동맹으로만 그쳐서 안 된다. 인권, 시장경제 등 민주주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보다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동맹관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국관계는 벌써부터 일변하는 모습이다. 한미동맹의 복원기류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인권문제에 결코 입을 다물지 않겠다는 대통령 당선자의 발언에서 달라진 양국관계, 달라진 세상을 실감한다.
섭리라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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