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가 세계를 재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로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목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피정복 민족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로마의 유연한 사고방식이야 말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당대 최강국이던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대 세계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언급하였다.
기원전 2세기의 포에니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면, 패장을 용서하지 않고 죽음으로 다스린 카르타고와 달리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승리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킬 기회를 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로마는 이미 큰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학원 유학생으로 건너와 학업을 마치고, 다양한 배경과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수년이 되었다. 직장 초년병의 정신없는 적응기를 지내고 나니, 유사한 사안에 대하여 한국적 사고와 미국적 사고가 상이하게 다른 경우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유연한 사고방식이야말로 그 차이점 중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종종 같은 부서에서 20~30년간 근무하고 퇴직한 사람들이 계약직 파트타임 사원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돌아온 ‘역전의 용사들’의 상사는 정작 경력 10년도 채 되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들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신입으로 뽑았던 직원의 수하로 들어가, 그 지시를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본다. 우리 보기에 흥미진진한 이 광경에 양념을 더하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이 ‘파트타임’ 사원들이 전혀 거리낌 없이 새파란 과장의 지시에 복종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낯선 광경을 볼 때마다, 십수년전에 드라마를 보며 아버지가 하셨던 혼잣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즈음 한국은 IMF 사태 직후였고, 지금은 이미 일상어로 익숙해진 ‘명퇴’라는 낯선 신조어가 처음으로 입에 오르내리던 흉흉한 시기였다.
그 드라마는 명퇴를 맞이한 한 40대 중반의 주인공이 사우나, 공원, 약수터로 이어지는 방황을 끝내고, 자신이 일하던 회사로 복직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줄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딱히 뭔가 기억에 남는 수작은 아니었지만, 드라마 막판에 주인공이 예전 자신의 부하 직원이었던 새로운 부장에게 “나 열심히 할 수 있어”라며 호소하는 장면만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당시 이 장면을 보시던 아버지는 “저런 게 어디 있어?”라며 유별날 정도로 강한 반발을 보이셨다. 돌이켜 짐작컨대 그 반응이야말로 유사한 상황에서 가장 흔하게 기대할 수 있는 ‘한국적’ 사고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장년층의 재취업 문제가 큰 사회문제라는 우울한 소식을 몇 년째 접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하듯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장년층의 재취업 문제가 장년층 재취업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국한된다면, 이것이 올바른 해결책이 될지는 의심스럽다. 대다수의 중장년층 재취업이 단순 노무직에 국한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에 비춰본다면 결국 이 정책적 접근이라는 것도 단순 노무직의 재생산에 그칠 가능성이 높게 마련이며, 이는 결국 장년층이 축적하여 온 경험을 낭비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원래의 취지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그보다는, 단선적이고 수직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유연한 발상의 전환으로 좀 더 경제적이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예를 들어 퇴직 후에 자신의 예전 부하직원의 아래로 돌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장년층 재 취업난에 대한 좋은 대안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자백가의 시대처럼 열 손가락으로도 셀 수 없는 많은 후보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 치열한 ‘정책선거’의 와중에서 그와 같은 사고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설 자리가 없을 듯하다. 아마 이번 선거가 끝나면 자신의 ‘재취업’에 대해 고민해야 할 후보들도 상당수 있어 보이는 것이 현재의 판세인데 이런 발상의 전환에 관한 담론은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정광필
LA카운티 지역계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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