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열풍이 여전한 모양이다. TV 드라마 ‘주몽’이 방영된 게 언제였나. 이후 한국에서 대형 TV 드라마가 제작됐다 하면 소재는 온통 고구려였다. 그 중 뒤늦게 방영된 드라마가 ‘태왕사신기’다. 이 드라마도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종영됐다고 한다.
매주 2,000만 이상이 TV 앞에서 고구려를 만났다. 연인원으로 치면 30억 이상이 고구려 드라마를 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동시에 나온 말이 ‘고구려세대’라고 한다.
한 가지 기이한 사실도 발견된다. 10대에서 70대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전 계층이 드라마를 통해 고구려에 대해 학습을 했다. 그런데 그 ‘고구려세대’가 고구려의 고토(故土)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수만의 고구려의 후손이 옛 고구려 땅에서 숨어 지낸다. 한 때 그 숫자는 30만을 헤아렸다. 탈북자들이다. 그뿐인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혹한 인권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 역시 고구려의 옛 땅 한 구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북한 주민들이다.
그들의 그 처지에 고구려세대는 정작 무관심이다. 하기는 드라마는 드라마다. 현실은 현실이고. 그러니 팬터지의 세계와 현실을 명확히 구별할 줄 아는 영리함 때문인가. 그나저나 이 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미국의 세기를 뒷받침 하는 가장 중요 요소는 무엇일까. 이민이다. 최근호 ‘포린 폴리시’에 실린 한 논객의 주장이다. 테러리스트. 중국의 부상. 깡패 국가들. 그 어느 것도 미국 세기를 뒤엎을 위협 요소는 되지 못한다. 그 비밀무기는 다른 게 아니다. 이민이라는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수퍼 파워의 공통점은 다민족 사회라는 데 있다. 과거 로마가, 몽골제국이 그랬다. 그 다민족 사회가 지닌 특징은 똘레랑스’(tolerance·사회적 관용)다. 계속 이어지는 주장으로, 대제국을 지탱시켜 준 그 똘레랑스의 현대적 의미를 이 에세이는 이민으로 해석했다.
미국의 강점은 어디에 있는가. 이번에는 뉴욕타임스의 데이빗 브룩스가 던진 질문이다. 그 역시 답을 이민에서 찾았다. 지난 25년간 미국은 2,000만 이상의 합법 이민을 받아들였다. 이 엄청난 인적 자산의 유입과 함께 미국은 유례없는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국부(國富)는 어디에 있나’-. 월드뱅크가 최근 펴낸 보고서의 타이틀이다. 국부를 가져오는 자본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국토, 천연자원 등 ‘자연자본’이 그 하나다. 다음은 공산품과 사회 간접자본 등 ‘돈으로 만든 자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국부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본은 ‘보이지 않는 자본’이라는 게 그 결론이다.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 법질서, 투명성 등이 바로 ‘보이지 않는 자본’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 요소로 선진국의 경우 국부의 80% 이상이 여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각기 던진 질문과 답은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게 아닐까. 인간 존중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제도와 정책이 생산성을 높이고 사람이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 낸다. 그 근간은 인권이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법치다.
고구려세대가 보이는 무관심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앞서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어째서 그토록 무관심인가. ‘십자가의 영광만 보고 고난은 외면한다’-교회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다. 이 말이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는 것 같다.
여기에다가 ‘똘레랑스’의 이론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나. ‘이민족은커녕 피를 나눈 동족의 참상도 외면할 때 돌아오는 것은 축복과 번영이 아닌…’-더 써나가기가 민망하다. 혹시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게 아닐까.
온통 BBK에 가려 있었다. 자나 깨나 BBK 타령이었다. 그 와중에 또 한 차례 대한민국이 망신을 했다. 유엔 총회의 북한인권 결의안에 기권을 했다. 전 세계가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대한민국이, 참상을 외면하고 기권을 한 것이다. 그것도 네 번째나.
BBK의 망령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선 후보라는 사람들이 모처럼 정책토론회라는 걸 했다. 명색이 안보와 대북정책과 관련된 토론이다. 검찰의 수사가 발표된 마당이다. 그런데도 계속 BBK 타령으로, 여전히 불복한다는 태도다.
스스로를 법치파괴 세력임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 인권문제는 그리고 거론되지도 않았다.
다시 고구려 학습이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적극적인 이민정책(난민수용)에, 예맥에, 말갈, 거란 등 북방민족을 모두 포용한 다민족 사회였다는 게 그 답이다.
진정한 인권대통령의 탄생이 보고 싶다.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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