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정국의 안개는 걷혔지만
이기영(주필)
한국의 대선운동에서 최대 변수로 등장했던 BBK 사건이 검찰의 수사 결과 이명박 후보의 무
혐의로 최종 결판났다. 선거 2주일을 남겨놓은 시점까지 유권자 지지율에서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고 있는 후보가 낙마하고 판세가 뒤집히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사건이 엉뚱하게도 사기
꾼 남매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번 대선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큰 이변
이 없는 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도 정동영 후보측 등 이명박 후보의 반대진영에서는 검찰의 수사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이 후보 봐주기 수사라고 비난하고 있다. 검찰수사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도 벌이고 있다. 지난
2000년 미국의 대선에서 대법원이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고어 후보가 다수 유권자의
득표를 하고도 패배를 인정했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번에 검찰이 이 후보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이 후보에게 불리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더라도 반발을 일으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미 ‘민란 수준의 저항’을 경고했었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가 그 정도의 대접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우기 지금은 대선 막바지로 공직자들의 보신을 위한 줄서기가 한창인 시기이다. 눈치빠른 공직자들은 앞을 다투어 당선이 유력한 후보자에게 붙는다. 과거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는 임창열 경제기획원장관의 보고를 받아 대통령보다도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했다. 때로는 국정원의 간부들까지 국가 기밀을 빼돌려 유력 후보에게 넘기기도 한다. 이런 실정이니 검찰이 공정한 수사를 했다고 해도 유력 후보측의 편을 들었다는 공세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유력 후보쪽에 줄서기는 공직자들 뿐만 아니다. 줄서기가 출세길인 정치판에서는 선거 때가 대목이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교수, 언론인, 사업가 등 정치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도 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해서 줄서기에 열을 올린다. 대선을 앞두고 1년 이상 5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해 온 이명박 후보쪽에 줄을 선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마치 손님이 많은 식당은 바깥까지 줄을 길게 늘어서고 손님이 없는 식당은 안이 텅텅 비듯이 정치권의 줄서기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다.
이회창 후보가 여론의 벽을 뚫지 못한 것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후보쪽에 줄을 섰기 때문이다.이명박 후보쪽이 줄이 워낙 길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대선에서는 덕을 보지 못하더라도 내년 총선을 위해서 다른 쪽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될 것
을 뻔히 알면서도 그 반대편에 서는 사람들이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면 이회창 후보는 당연히 사퇴를 해야 할텐데 사퇴는 커녕 몸집 불리기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또 반 이명박운동을 위해서는 정동영 후보측과도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번 선거를 흔히 보수 대 진보의 구도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정파와 정파가 이해관계로 이합집산하면서 경쟁하는 사태는 대선 이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이번 선거를 흔히 노무현 학습결과라고 하는데 그것은 노무현대통령의 정치에 국민들이 너무도 실망하여 정권교체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노무현 학습효과는 또 한 가지가 있다. 대통령의 말이 정치권에 먹혀 들어가지 않는 춘추전국시대적 현상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도 그런 안개정국이 될 수 있다. 이 후보가 월등히 우세한 보호세력을 배경으로 국민으로부터 최선의 선택이 아닌 차선의 선택을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당선 이후에도 수많은 반대 정파의 도전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칼럼과 전문가들이 BBK 사건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독자들로부터 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지 않느냐는 항의 아닌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치고 박는 공방전과 현란한 이론 전개가 모두 어느 쪽을 편들기 위한 것만 같아서 어느 쪽에 기울어지는 글을 쓰기가 두려웠다. 더구나 한 나라의 지도자를 뽑는 대선에 이런 인물들이 나와서 유치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 실망스럽기만 했다. 안개처럼 답답했던 이런 필자의 심정이 이번 대선을 지켜보는 많은 독자들의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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