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논설위원)
11월이 가을비 속에 조용하게 지나고 있다. 행사가 많은 10월과 연말 분위기의 12월 사이에서 11월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그러나 한 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차분하지만 않을 것이다. 11월 하순의 추수감사절을 지나면 바로 한 해의 마감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이즈음에 감사절이 들어있는 것은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뜻이 있을 것이다. 항상 감사한다면 별도로 특별히 감사절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노인 한 분이 있다. 10여 년 전, 길거리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수건을 나누어 주던 한 노인이다. 그 노인은 당시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감사하는 표현을 어떻게 그 노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까. 수건에는 ‘수고하십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세 마디의 글자가 새겨 있었다. 노인이라고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분은 일생동안 감사할 일이 많았던 것일까? 아니면 평생 동안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의미에서 벌인 퍼포먼스였을까? 삭막한 11월이 되면 가끔 지금은 돌아가셨을 그 노인이 생각나는 것은 이 세상이 너무 무미건조해서 인지도 모른다. 그 노인이 거리에서 벌인 이른바 ‘수, 고, 미’ 운동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당시 신문에 기사화 되었던 거리의 노인, 그는 정부기관의 고위관리로 일하다 은퇴한 사람인데 자신의 마지막 남은 조그마한 힘으로 사회를 정화시켜 보고자 하는 의지에서 수건을 들고 길에 나섰던 것이었다.
미국에서 우리와 더불어 사는 타민족이 너무나 잘 아는 한국말은 “빨리 빨리” 하고 “안녕하세요” 다. 이제는 그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수고하십니다를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는 빨리 빨리 대신에 이왕이면 “수고하십니다”나, “주급주고 시키는 일인데…” 대신 “고맙습니다” “그 정도를 갖고 뭘 그래!”대신에 “미안합니다” 라고 말을 한다면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얼굴에 화색이 돌 것이다. 한국가게에서 일하는 히스패닉 계 종업원들이 한국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상소리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다. 한국인들이 바쁘니까 마구잡이로 욕지거리를 일상용어처럼 사용하며 작업지시를 하니까 그들은 그게 좋은 말인 줄 알고 부지런히 배운다는 것이다.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평소 연습이 되어야 한다. 쉬운 감사의 표현들도 때로는 일상화되지 않아서 표현을 잘 못한다. 아니 표현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표현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11월 감사절부터 표현을 하는 절기라고 해야 할까? 일 년의 마지막이 되는 12월, 이 달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수고했다는 말,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넘치도록 해야겠다.
무엇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인가? 떠들고 노는 아이들을 보면 생명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생명’이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살아서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 아닌가? 그래서 종교인들은 영생을 희구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낙원’도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이다. 늘 불만인 사람에게는 그 것 마저 필요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본적인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혜택을 받는 햇빛이라든가, 공기, 바다, 심지어는 바람까지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자연에 감사해야 한다. 사람은 내가 잘 나서 내 힘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를 도와주는 친구나 이웃, 직장의 동료, 또는 주위의 어른이나 친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덕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12월에 들어서면 한해 마무리에 모두가 바빠진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동안 도움을 준
주위에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훈훈한 연말을 보내도록 하자.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때는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정말로 쉽지 않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마음을 전하는 것인가?
고맙다, 수고했다, 미안하다 하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라도 진실로 건네면 마음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한 해 동안 분주했던 마음을 조용히 추스리며 흥분되고 바쁜 12월을 어떻게 보낼까 차분히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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