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어 한인들의 관심도 온통 정치에 가 있다. 한인들끼리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정치 이야기가 꽃을 피운다. 교회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우리의 모국이요 미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어 이번 선거가 우리들 실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도 있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 쏠리는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 수준이 아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하여서는 쉬운 말로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후보자의 지도력, 인품, 이데올로기, 정책, 소속 정당, 자금능력 등이 우수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한국에서 지연, 학연, 혈연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종연’(宗緣), 곧 종교와의 인연이다. 어떤 점에서는 혈연, 학연, 지연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종연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번 미국대선에서 복음주의 표를 확보한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싱거울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둔 것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한다. 선거 귀재 칼 로브의 지혜였다던가.
해방 이후 한국의 선거에서도 종교는 매우 큰 변수가 되어 왔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 세 종파가 마치 솥발처럼 버티고 있어 어느 한 종교에게라도 미움을 사면 타격을 받는다. 가히 삼국시대에 비교되는 ‘삼종시대’라 하겠다.
오죽했으면 자신은 천주교, 부인은 기독교, 그리고 아들은 불교였던 대통령 후보도 있었고 개신교 장로이면서도 절에 가서 합장하거나 부인이 불교의식인 수계를 받기도 했다지 않는가. 그리고 보수파 목사들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비명이 한국에서 지금도 계속 들려오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가 투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종교가 정치를 지배해 왔으니 단군조선을 ‘제정일치시대’였다고 평가하지 않던가. ‘정제일치’가 아니고 ‘제정일치’ 곧 종교와 정치가 합작했지만 종교가 그것을 주도했다는 뜻이다.
인류문명사를 보면 그래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종교가 정치를 지배 ▲정치가 종교를 지배 ▲정치와 종교의 상호견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정치가 종교를 말살하는 다섯 가지 체제들이다.
중세의 유럽 기독교 국가와 이란, 이라크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한다. 그리고 영국과 일본은 지금도 형식상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이집트나 터키 같은 나라는 종교와 정치가 상호견제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북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산정권들이 종교말살정치의 대표적 사례이다.
반면에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정교분리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헌법에서 보듯이 헌법상 국교를 두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서로 간섭하지 않으려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인들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금도 내고 투표권도 있으니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종교인들은 신념이 뚜렷하기 때문에 같은 종교를 가진 후보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가운데서도 이슬람과 기독교의 정치참여도가 유난스럽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하여 몇 가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우선 일정한 종교가 지배하는 정치체제 아래서는 십자군전쟁이나 이슬람독재정권에서 보듯이 더 많은 죄악이 저질러졌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정권과 종권이 결탁하면 더욱 잔인하게 되는데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으로 같은 종교인이 통치자가 되어야 그 종교가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하게 된다는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교훈이다. 가령 이승만, 김영삼 같은 교회장로들은 정치에 실패함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는 독재와 무능으로 불교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큰 손실을 입혔다. 반대로 바벨론 왕 고레스나 박정희는 오히려 그의 이방종교인 유태교와 기독교를 보호하고 확장시키는 일에 공헌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 더 있다.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면서도 부드러운 압력단체로 남아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점이다. 우선 종교는 자체의 생존문제가 걸려 있는 일이 아니라면 너무 사납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을 폭군으로 만들면 그것은 바로 그 종교 자신의 자살행위일 뿐이다.
아무튼 모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대통령을 뽑는 일에 특정종교가 ‘몰표’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투표는 감성이나 영성으로 하기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하는 것이 바른 도리 아닌가.
이정근
목사·유니온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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