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논설위원)
한인사회가 경제적인 향상으로 이제는 어느 정도 미국사회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미국사회를 깊숙이 뚫고 들어갈 정치력이나 힘은 아직까지 미약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이민사가 얼마 안 된 우리의 입장에선 그런대로 안정된 단계에 접어든 상황이다.
한인사회 인구가 벌써 50만 소리가 나온 지 오래이고, 경제력도 부자의 개념이 예전의 백만에서 이제는 천만 달러로 바뀔 만큼 비대해졌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힘이 나는 일인가!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미국에 이민 와 정착하지 못하는 무수한 한인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도 안정된 직장이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고, 편안하게 안주할 거주지가 없어 하루하루 버거운 가운데 살고 있다. 설사 의식주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언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이 나라의 문화나 제도, 생활을 잘 몰라 안절부절 하며 힘겹게 살고 있다.
일찌기 와서 정착한 한인들이 이들을 위해 안내자 역할을 잘 해준다면 이들의 삶은 훨씬 더 어렵지 않게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안정된 한인들도 실은 이민초기 누군가 그들의 눈과 귀가 되어주거나 앞에서, 혹은 뒤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스스로가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노력하고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새로 이민 오거나 이민 온 기간이 오래 됐더라도 어려움에 처한 한인들을 위해 눈과 귀가 되어 도움을 주고 잘 적응하도록 지팡이가 돼야 할 때다.
최근 한인사회에 유복자 아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던 최수지씨가 말기암으로 수술을 받자 이들 모자를 돕기 위한 한인들의 이어지는 온정은 사랑이 메말라 가는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고 있다. 내가 베푼 조그마한 정성과 사랑이 꺼져가는 한 생명의 삶에 희망과 꿈을 주었다면 그 것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이러한 온정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이 많이 번져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때 마침 뉴욕한인회도 한인사회에 도움이 필요한 한인들을 돕기 위해 예전의 복지재단을 다시 두어 활성화시키겠다는 좋은 방안이다. 이것은 이민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기구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픔이나 고통을 서로 나누면 반으로 절감한다고 했다. 우리가 이웃이나 친구, 혹은 동료를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때, 내 주위나 사회는 자연히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열린 마음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열리면 흐린 날도 다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용량이 커지는 법이고, 닫히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는 것이 또한 마음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가 따스한 것은 열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때이고, 사회가 따스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이 많을 때이다.
이민을 와서도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일등객 노릇을 하는 특별한 사람도 있지만 이민열차란 세속 속에서 세속을 싣고 가는 완행열차다. 서서 가는 사람, 앉아서 가는 사람, 등받이에 기대서 눈을 감고 가는 사람, 복도에 앉아서 졸고 가는 사람, 피곤한 것이 이민열차인 것이다.
이 속에서 어느 사람은 자리를 양보하며 고단한 사람을 앉히기도 하고, 어느 사람은 한 병의 음료수를 나누어 마시기도 한다. 돈이 많다는 특급인생들은 자기 혼자서 늘어진 팔자를 즐길 런지는 몰라도 인생에서 볼거리는 다 놓치는 사람들이다. 볼거리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야 자리도 양보를 하고, 음료수도 나누어 마시게 된다. 내가 베푸는 작은 고마움에는 몇 배의 따스한 말과 감사하는 말이 우선으로 돌아온다.
길어야 백년을 같이 사는 한 시대의 인연, 비슷한 시기에 온 사람들이 비슷하게 살다가 비슷한 시기에 이 땅을 다 떠나게 된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내 눈에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가! 단 한 번의 기회를 살고 가는 우리 주위에 어려운 이웃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다면 당신은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동족이 모여 사는 이민사회, 우리는 무엇으로 따스한 이불을 지을 것이며, 문만 열면 낯선 사람들이 지천인 이 머나먼 이역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힘을 삼을 것인가. 돕자. 서로 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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