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 고어는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에게 전체 득표에서는 이기고도 선거인단에서 지는 바람에 대통령 자리를 내줘야 했다. 뼈아픈 패배 후 고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지난해 그는 한 시사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대선에서 진 후 특히 세상인심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회상했다.
부통령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고어는 실리콘밸리 닷컴 기업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가 전화를 걸면 상대는 아무리 중요한 회의중이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그의 전화를 받고는 했는데 그가 대선에서 낙마하자 이런 우호적인 태도들이 조금씩 변해 가더란 것이다. 메시지를 남겨 놓으면 한참 지난 후에야 리턴 콜이 돌아오더니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아예 리턴 콜조차 없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인심의 무상함을 절감했다고 고어는 털어놨다.
그는 이런 분노의 감정을 환경운동에의 헌신을 통해 조금씩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 나갔다. 그리고는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 대선에서 두 차례나 아슬아슬하게 고배를 마셨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출마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성 없는 시나리오로 치부되던 그의 출마설은 최근 상당한 힘을 얻으면서 점차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이 전총재가 출마 여부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은 상황인데도 대선 정국은 벌써부터 긴장감으로 한층 팽팽해지고 있다. 설마 하던 그의 출마설이 현실화 될 경우 싱겁기 그지없던 대선구도에 일대 파란과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5년 전 노무현 후보에게 예기치 못한 충격의 패배를 당했던 이회창 전 총재는 고어와 비슷한 마음의 궤적을 지나 왔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한 대선 결과. 대권에서 멀어진 후 달라지는 주변과 세상의 태도. 이런 것 때문에 이회창 전 총재 또한 무수히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 않았을까 싶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은 잊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잊혀지느니 차라리 스캔들로라도 기억되기 바란다는 냉소적 비유도 나오는 것이다. 특히 대선같은 거대한 승자독식의 게임에서 진 사람이 치러야 할 ‘세상인심의 외면’과 ‘잊혀짐’이라는 대가는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국가 경영을 꿈꾸며 시간을 분초로 나눠 뛰던 정치인이 갑자기 무관심의 세계로 내쳐졌을 때 그가 맛보게 되는 것은 한가함이 아니라 사지가 꽁꽁 묶인 듯한 무력감이다. 고어가 인터뷰에서 토로했던 것은 바로 이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선출마의 유혹을 받을만한 정치적 상황이 미미하나마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 지지자들의 강력한 출마 촉구와 한나라당 내의 분열 기류, 지지멸렬한 범여권 상황, 고공 행진 속에서도 수그러들지 않는 이명박 낙마론 등등이 그것이다.
그가 출마를 선언할 경우 판세의 요동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도 이 전총재의 출마는 ‘이명박 대세론’을 근본부터 흔들게 될 것이 확실하다.
양당정치의 뿌리가 견고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제 3당후보는 시오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었다. 1901년 42세 때 미 최연소 대통령으로 취임해 성공적으로 2번의 임기를 마쳤던 루스벨트는 자신의 뒤를 이었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의 국정수행이 만족스럽지 않자 1913년 ‘불 무스’(Bull Moose)라는 진보정당을 만들어 다시 출마한다.
그는 제 3당후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27%가 넘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공화당 표의 분열로 대권은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 돌아갔다.
이회창 전 총재는 10년 전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 줬던 ‘이인제 학습효과’와 3수 끝에 대권고지에 오른 ‘김대중 학습효과’ 사이에서 선택을 놓고 고민 중일 것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속내를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잊혀진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에서 출마를 결정한다면 그것은 필패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어가 지금 대선출마를 놓고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칫 대선에서 패배할 경우 다시 한번 심적인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환경운동가로서 쌓아 온 크레딧까지 동시에 잃어 버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그의 측근들은 귀뜀한다. 조금 때가 묻기는 했어도 ‘대쪽 이미지’를 자산으로 여겨 온 이회창 전 총재에게도 똑같은 우려와 고민이 없을 수 없다.
또 한가지. 이 전총재의 결정은 출마가 됐든 불출마가 됐든 곧바로 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뉴스의 중심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입만 쳐다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서둘러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질 터이니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