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가 불타고 있다. 지난 주말 뜨거운 샌타애나 바람을 타고 시작된 산불이 민들레 씨 날리 듯 동시 다발적으로 번지면서 남가주 하늘은 온통 잿빛이다. 산불로 인한 재와 연기로 숨쉬기에 지장을 받을 정도이다. 수십 곳의 산불 발생지역 인근 주민들은 겨우 몸만 빠져 나온 후 ‘자연의 분노’를 공포스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분노가 쉬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발생하는 참사인데도 어찌해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무력감을 더해준다. 미국에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는 한 한인은 “원시적 재앙이랄 수 있는 산불이 가장 문명이 발달한 미국에서 이처럼 무섭게 번지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자연과 인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발생했던 가장 큰 산불은 지난 1988년 무려 넉달동안을 꺼지지 않고 탔던 옐로스톤 산불이다. 산불로 탄 면적은 무려 150만에이커. 그런데도 당시 미국 정부는 진화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불을 그대로 놔뒀다.
진화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불이 장기적으로 생태계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발생지역에 인명피해와 인공구조물 피해 위험이 크지 않았던 것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몇달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한 옐로스톤 산불 프로그램을 보니 전문가들이 나와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산불은 나무를 쓰러뜨려 태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땅 위에 흩어져 있는 ‘로지 폴’이라는 솔방울 형태의 씨주머니를 터뜨려 새로운 생명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 불에 탄 나무는 이런 씨앗들이 나무로 자라는데 긴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산불은 재앙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숲의 생명력을 키워주고 장기적으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해 주는 자정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새삼 ‘순환의 법칙’을 생각하게 된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은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를 쏟아 내 인간세계를 물로 휩쓸었다가 다음에는 시뻘건 화마로 위협하는 자연을 인자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가 나타나면서 자연의 심술은 그 빈도와 정도를 더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른바 ‘가이아 가설’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을 뒤바꾸고 자연과 인간관계를 바람직하게 재정립하자는 주장을 편다. 그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독선적 견해도 잘못되었고 또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지구를 곧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비관적 견해도 문제점이 있다고 양비론적 견해를 보인다.
러브록 주장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연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들이 곳곳에서 자연을 훼손하고 생태계에 상처를 입히고 있지만 자연이 자연에게 가하는 재앙의 파괴력에 비하면 아직은 ‘조족지혈’이다. 몇 년전 온 중국을 물속에 잠기게 했던 대홍수와 올 여름 그리스를 초토화 시켰던 대형 산불, 그리고 지금 남가주를 불태우고 있는 산불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지구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갖가지 기후 이상과 재해가 지구의 장래와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자연에 의한 자연 파괴가 옐로스톤 산불의 경우처럼 스스로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메커니즘의 작동인지 아니면 병들어 가는 징후인지 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좀 더 연구와 관찰이 필요하다.
산불로 소중한 재산과 추억을 잃을지도 모를 상황에 놓여 있는 주민들에게 “자연의 메커니즘이냐” “병들어 가는 과정이냐” 하는 논쟁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바라보면 산불 참사는 왜 자연 앞에서 인간이 겸손해져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만든다. 인간은 자연 앞에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자연의 노여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종종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이번 산불이 휩쓸고 간 폐허 위에서도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약동의 숨결이 들려오길 기대해 본다. 지난 1871년 대화재로 초토화 됐던 시카고가 이를 전화위복으로 해 더욱 역동적인 도시로 태어났 듯이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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