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우리 신문 속에 같이 배달되는 뉴욕타임스 섹션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독자들을 여럿 만났다. 한국 신문에서는 보기 어려운 미국사회나 국제사회의 속살 같은 이야기들을 그 섹션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 뉴욕타임스 섹션 머리기사로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었다. 국방부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주둔 전투부대에 민간인 자문단을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전투와는 거리가 먼 이들은 인류학자 등 사회학 분야 사람들. 미군들에게 현지 부족·민족들 간의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주 업무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눈을 길러 주는 것이다.
전쟁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을 전장에 배치하는 것은 군 당국이 느끼는 한계와 상관이 있다. 총 쏘고 폭탄 터트리며 우격다짐으로 적을 항복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야 전쟁에 승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인간 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능력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이 전쟁이든, 비즈니스든 다른 어떤 전문 분야이든 분야별 전문 기술, 즉 하드웨어 외에 관련 대상의 마음에 접근하는 감성,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감성은 남성보다 여성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여성 리더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뉴욕타임스 섹션이 나온 지난 17일 LA 타임스에는 반가운 얼굴이 비즈니스 섹션 1면을 차지했다. 민 김 나라은행장이었다. UC 데이비스가 발표한 ‘캘리포니아 여성 비즈니스 리더’ 보고서에서 여성 고위직 진출이 가장 활발한 기업으로 나라은행이 뽑힌 데 따른 보도였다.
UC 데이비스가 가주의 400대 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성이 CEO인 기업은 아직도 13개에 불과하다. 전반적 여성들의 승진 현황 역시 지난해나 별 차이가 없어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은 여전하다”고 이 보고서는 결론지었다.
이번 보고서로 나라은행은 유리천장 없는 모범기업으로 자리매김 했지만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은행가 역시 보수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네이다.
그날 아침 김 행장이 라디오서울방송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들었다. 80년대 초 창구직원으로 입사한 그가 처음 벽에 부딪친 것은 대부 담당으로 부서를 옮길 때였다. 그가 대부 업무를 해보고 싶다고 하자 상사는 단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한다. “그건 남자 일”이라는 것이었다.
10번쯤 간청을 해서 그 부서로 배치를 받고 나니 이번에는 고객들이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20대의 1.5세 여성에게 40~50대 1세 남성 고객들이 자신의 재정형편을 털어놓고 상담한다는 것은 당시 정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고심하면서 남성 동료들이 일하는 걸 관찰했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없는 뭔가를 찾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절과 신속 - 그것이 그가 찾아낸 ‘소프트웨어’였다.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며 최대한 친절하게, 가능한 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주는 데 ‘어린 여자’라고 등 돌릴 이유가 있겠는가. 빈틈없는 일처리 능력에 여성 특유의 감성적 접근이 성공을 한 것이었다.
여성들이 업무현장에서 여성성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전문분야에 진출한 여성들은 여성다움을 감추는 것이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했다. 남성의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 보다 더 남성적으로 행동한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여성들이 타고난 여성성을 마침내 소프트웨어로 활용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세계 보건기구를 이끄는 마가렛 챈 사무총장의 말은 여성들이 기억해둘 만하다.
그가 2003년 사스파동 당시 전염병 담당 사무차장으로 일할 때였다. 사스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병에 걸리는 모습을 보며 그는 현장에서 여러 번 울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성들이 가슴으로부터 상대의 아픔을 느끼는 감정이입은 여성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소중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산업경제, 정보경제 시대를 거쳐 앞으로는 보살핌의 경제 시대가 도래한다는 전망이 있다. 대부분의 일은 기계들이 처리하기 때문에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 가장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숨겨진 보석 같은 자질이 마음껏 활용될 시대가 오는 가 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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