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정(회사원)
나처럼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타민족과 처음 만나 인사할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거의 예외없이 ‘남쪽이냐? 북쪽이냐?’는 후속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물론 남쪽이다”고 대답하고선 숨돌릴 사이도 없이 HDTV, 자동차, 그리고 당신이 지금 허리춤에 차고 있는 셀폰도 아마 한국산일 거라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도 문득 상대방이 ‘경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너희들은 오죽 못났으면 아직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겠나’ 라는 생각을 할 것 같은 분단국민 컴플렉스에 눌려 다소 흥분됐던 목소리는 금방 차분한 어조로 가라앉는다.이런 나와 같이 한국인들은 이념이 퇴색되고 국경이 허물어지며 경제의 벽 또한 없어져 가는 금세기의 세계역사 흐름 속에서 왜 하필 우리 민족은 아직까지도 분단국가로 남아있어야 하나? 하는 한(恨)의 응어리를 저마다의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2차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통일을 향한 큰 발걸음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1차 회담 때의 약속인 답방을 해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죽여가며 그 많은 인원이 올라가는, 야단법석만 떨었지 알맹이 없는 ‘정치 쇼’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나는 생활의 다른 문제들은 전문가들의 견해나 충고를 귀담아 듣지만 남북 분단문제 만큼은 전문 연구소나 소위 북한전문 교수들의 말은 새겨듣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곡을 찌르는 해법은 커녕 변죽도 울리지 않는 일반론적 얘기만 늘어놓기 때
문이다. 그 대신 나는 저잣거리의 상인들이나 택시 기사와 같은 일반 시민들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어쩌다 기회가 닿아 그들을 만나면 “통일은 곧 될 것 같습니까?”라는 나의 물음에 “허, 김정일이 꽉 쥐고 안 내놓는데 됩니까?”라던가 “백날 해봐야 됩니까. 김정일이 끄떡도 않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말하자면 김정일만 마음을 돌려 움켜쥐고 있는 국가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적어도 명쾌하고 후련한 대답인 것이다.
나는 2차 정상회담 뉴스에 비친 장면 중에 남파된 간첩들을 검거, 색출해내야 하는 총 책임자인 국가정보원장이 간첩들을 남파하는 최고위 두목인 김정일 위원장이 뻣뻣이 선채 내민 손을 머리를 조아리고 두손 모아 잡고 마치 임금님을 알현하듯 감읍해 하는 장면을 보고 도대체 저 사람이 따라갈 자리인가? 한국이 언제부터 저렇게 변했나?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북쪽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고, 이제 남쪽도 사실상 상당부분 다스리고 있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마음을 돌려 한국의 통일을 위해 자기의 모든 권력을 포기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은 적어도 그의 생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이 보다 현실성을 동반한 시대관이 될 것 같다.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고 개인간의 싸움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죽음의 직전까지 몰고 간 칼부림을 한 싸움을 한 후라면 서로가 칼을 거두고 자신의 반성과 상대방에게의 사과가 선행되어야 추후 대응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친구관계의 유지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의 힘에 위압감을 느껴 돈으로 선의를 베풀어 상대방의 호감을 얻으려는 시도를 한다면 스스로가 상대를 강자로 만들어 주고 자신은 약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힘의 논리’이다.
이런 화해의 원칙도, 힘의 논리도 거슬은 것은 노대통령이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노대통령은 이미 굳어진 역학구도 내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한번 대다수 국민의 정서와는 반하게 김위원장의 장수를 빌면서 김정일 체제의 건재함을 바라는 아첨성 발언을 함으로써 약자 입지를 더욱 굳히고 국민의 심기를 편치 않게 만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임기를 생각하면 그것 또한 관심 둘 바는 아니다. 2개의 상반된 체제가 하나로 통일되기 위해선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로 바뀔 때만 가능하다.
나는 다음 대통령은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헤아리지 못한 사회주의 경제는 폐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를 실행하는 자유민주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정연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고 막강한 현재의 경제력을 지렛대로 삼아 현재의 기득권 세력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후세에 ‘한국 통일의 공로자들’이라는 좋은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에는 틀림없이 그리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될 수 있는 체제전환 이정표, 즉
통일 이정표(Road Map)를 작성해 북한 헌법에 명시해 둘 수 있는 능력있는 인물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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