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영화 ‘밀양’은 죄와 용서, 신앙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신애는 남편과 사별 후 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피아노 교습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런 신애에게 외아들이 웅변학원 원장에게 납치돼 살해되는 비극이 닥친다. 절망하던 신애는 이웃집 약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고 여기서 위로를 얻는다. 신앙으로 절망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납치 살해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면회를 떠나는 신애에게 교회 목사는 “하나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 용서”라며 격려한다.
왜 용서는 힘든 일일까. 바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에고’ 때문이다. ‘에고’는 세상사람 누구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애쓴다. 심지어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자신도 용서 받을 자격이 없다고 끊임없이 속삭여 댄다.
그러나 이런 속삭임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10월 필라델피아의 작은 아미시 마을 니클 마인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찰스 칼 로버츠라는 트럭운전사가 아미시 학교에 침입해 어린 여학생 5명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미시 교도가 아닌 범인은 자신의 어린 딸이 병으로 사망하자 신에 대한 원망에서 이런 참극을 벌였다.
아미시는 공동체 지향적인 신앙관을 가진 기독교의 종파로 유럽에서 신앙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다 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와 펜실베니아와 오하이오를 중심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세속생활을 멀리하는 금욕생활을 하며 검은색 계통의 검소한 옷에 독일어 방언을 사용하고 주로 농사를 짓는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는 이들은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영화 ‘위트니스’를 통해 일반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미시들을 외부세계에 결정적으로 깊이 각인 시킨 것은 지난해 참사 후 그들이 보여 준 조건 없는 용서의 태도였다. 아미시들은 참사 발생 후 즉각 범인 로버츠를 용서한다고 밝혔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미시들이었으며 로버츠는 장례식 후 어린 소녀들 바로 옆에 묻혔다.
이런 용서의 태도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감명 받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떻게 그런 즉각적인 용서가 가능한가”라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아미시들을 오래 연구해 왔던 학자 3명은 니클 마인 참사 후 이런 용서를 가능케 하는 종교적·도덕적 힘의 근원을 찾아 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실로 나온 것이 최근 출간된 책 ‘아미시 그레이스: 어떻게 용서가 비극을 넘어 섰는가’(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이다. 끝없이 솟아나는 아미시들의 용서의 샘. 저자들은 이것을 ‘아미시 그레이스’, 즉 아미시의 은총이라 부르고 있다.
아미시들에게는 용서란 우리가 숨을 쉬듯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할 행위일 뿐이라고 저자들은 결론짓는다. “예수를 닮아 간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의 문제이며 성경의 복음서와 주기도문은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아미시들의 중심적 신앙관이다. 그래서 저자들이 인터뷰한 수많은 아미시들은 “참사가 490번 발생한다고 해도 우리는 70번씩 7번 용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 그대로 용서할 것”이라고 확신 있게 진술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인 마태복은 6장12절에 근거해 “하나님에게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기존의 가르침과는 선후가 바뀌어 있다(성경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는 아미시의 해석에 가까운 주해를 하고 있다).
다시 영화 ‘밀양’으로 돌아가 보자. 들뜬 마음으로 교도소를 찾은 신애는 유괴살해범과 얼굴을 마주한다. 그녀가 용서한다는 말을 건네려는 순간 웅변학원장은 평화로운 얼굴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 받고 하루하루 기쁨으로 지내고 있다”고 먼저 말한다. 유괴범의 고백에 신애는 절망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신애의 절망은 자신의 가장 큰 선물을 빼앗아 간 하나님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니까 말이다.
용서에 관한 아미시들의 태도는 개인주의와 응징의 철학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어리석고 순진한, 비현실적인 가치관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원수를 용서하기는커녕 형제들조차 용서하지 못하면서 사랑을 운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과 도전을 던지고 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는 ‘아미시 그레이스’. 그것은 무조건적이라는 점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아닐 수 없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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