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녀에게 본 보여야
신앙은 삶의 풍요로움 전달
대학교 때 학교 내에 바둑클럽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다. 한국, 대만, 그리고 일본에서 온 아마 유단자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는데, 서양 사람들도 의외로 많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가끔 프로기사들을 초청해서 행사를 갖는데 마침 그 주에 일본기원 소속의 하루야마(春山) 7단이 와서 40면 대국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으로 가보니, 과연 학생회관의 큰 라운지에 10면씩 4방으로 바둑판을 놓고 그 가운데 누가 서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한 점 두 점씩 놓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분명히 하루야마 7단이었던 것이다. 하루야마하면 키타니계 기사로서 조치훈 명예명인이 아직 두각을 나타내기 전에 제일 목표로 삼았던 형뻘 기사라는 것을 일본 바둑잡지에서 읽었었던 터라 갑자기 친근감이 발동을 해서 한번 두어보기로 했다. 물론 9점을 놓고도 참패를 했지만, 그날 하루야마 9단과 바둑을 둔 사람 200여명 중 4명을 빼놓고는 모두 지고 말았다는 얘기다. 대단한 실력이라고 했더니 몇 년 전에 오청원 9단이 왔을 때는 하루 종일 두고도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대국수도 하루야마보다 훨씬 많았었는데도 말이다. 똑같은 바둑을 두어도 프로기사가 두는 바둑은 우리들이 두는 바둑과는 전혀 다른 것을 통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주에 계속해서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똑같은 용서라도 우리 인생들이 하는 용서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와는 하늘과 땅 같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말하기 전에 그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필자는 고등학교 때 동부의 작은 기숙사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학교에는 두 대의 BMW 모터사이클이 있었다. 하나는 브라우닐이라는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데이빗 헤이그라는 학생이 타고 왔던 것이다. 전자는 BMW의 성능에 탄복을 해서 어렵게 무리를 해서 산 것이고, 후자는 그냥 모터사이클이나 타 볼까 하고 산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바로 얼마 전 25만달러를 건축기금으로 쾌척한 재력가였기 때문에 선생님의 것보다 훨씬 더 신형이고 성능도 좋았지만, 방학 때 집에 갈 때는 형이 마침 와서 형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갔고 그 것은 새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무슨 운동화짝 두고 가듯 그냥 학교 어느 곳에 자기 방에 있었던 최고 성능 스테레오와 함께 맡겨 두고 갔지만 말이다.
몇 년 전 ‘Passion’이라는 영화가 큰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한 가지 옥에 티라고 할까 아쉬웠던 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의 능력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던 것인데 너무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칫 잔학한 일을 즐기는 사람(일명 sadist)을 위해 만든 영화 같이 되었고 자칫하면 예수님을 아주 불쌍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죽음은 똑같은 죽음이었어도 그 죽음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돋보이게 하는 호기가 되었던 것이,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보다도 더 크신 분이신 것을 뚜렷하게 사실화 해준 현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이 하는 용서는 내가 양보해서 남에게 누리게 하는 일종의 ‘양보’의 성격이 강조가 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창고 어딘가에 놓고 간 BMW가 그 주인의 풍요로움을 말해 주듯이.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때도 양보하는 미덕으로만 가르쳐 준다면 이것은 아직 부족하다. 양보의 미덕인 용서는 힘들고 구차할 수도 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용서도 이런 용서보다는 한 차원 높은 성격에까지 이르러야 보다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선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의 본을 보일 때, 잘못한 일에 대한 너그러운 용서를 통해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크고 너그러운 사랑이 나타나야 되겠고, 아이들도 이것을 몸소 실천에 옮길 때 억지로 빼앗기는 것같이 양보를 하는 마음이 아니라 용서함과 동시에 전에 못 느껴 보던 크고 부유한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이런 큰 부유한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아니 우리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보다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신앙교육이 필요하게 되는 것인데, 첫째로 신앙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인한 부유함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또 “원수 갚는 것은 나에게 맡기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부유함을 얻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원수의 잘못함을 용서해 줄 때 하나님은 이것을 맡아서 갚아 주심으로 마치 원수들의 머리에 숯불을 올려놓은 것 같으리라고 하셨고(로마서 12:20), 저주를 오히려 축복으로 갚을 때 그 축복이 합당치 않으면 그 축복이 오히려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부모같이 유한한 사랑의 소유자는 살짝 빠지고 그 자리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신 연계시켜 주는 그런 맥락의 용서인 것이다(누가복음 6:28;35).
며칠 전 성경공부에서 한 여집사님이 한 말인데, 남자가 여자를 사귀다가 그 여자가 맘에 들어서 “너는 내꺼야!”라고 응석반 진심반 얘기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런 남자들이 모두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그 순간 그 여자가 “내 것”이 될지 모르지만 동시에 그 남자가 가진 모든 것은 그 여자의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일리가 있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신앙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소유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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