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남북 정상회담이 끝났다. 국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정상회담이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동을 주지 못한 회담인 것 같다. 정상회담의 성과에 관해서도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남북의 평화체제 추진, 군축 추진, 경협문제를 큰 성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실효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평화체제와 군축 추진은 미국의 의사에 따라 결정될 사안이며 경제협력은 주로 남한의 돈을 북한에 지원하는 것으로 신뢰 구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8개 항은 ‘남북관계 발전 평화선언’이라는 말 그대로 선언인 것이다. 이 선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문제는 앞으로 별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 합의내용은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이미 하기로 했던 내용이므로 정상회담에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정상회담에서 무언가는 주고받아야 했으니 이런 합의를 발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도 이번 회담에서 관심을 끈 것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홀대이다. 남한은 정상회담을 위해 무척 공을 들였다. 북한으로서도 남한은 결코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될 나라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기대 이하의 섭섭한 대접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대접이었다.
김정일은 환영식장인 4.15 문화회관 광장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악수를 나누고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환영식장에 먼저 나온 김정일은 노 대통령이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만 있었다. 첫 날 열린 환영만찬과 둘째 날의 답례 만찬에도 김정일은 참석하지 않았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상대했다.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때도 김정일은 동석하지 않았다.
북한은 외국의 원수가 방문했을 때 상대에 따라 의전상 철저한 차등을 둔다. 북한의 의전 수준에서 최고 예우는 김정일이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고 도착 당일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을 방문하며 만찬연회에 함께 참석한다. 지난 2000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2001년 장쩌민 중국 주석의 방북, 2005년의 후진타오 중국 주석의 방북 때 이런 절차를 밟았다. DJ의 방북 때도 이와 같았다.
이에 비해 약소국가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직접 공항 마중, 만찬, 회담을 하지 않고 예방만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대나 하대도 아니고 중간 대우를 한 셈이다.
그러면 왜 노대통령을 이렇게 대우했을까. 건강 악화 때문에? 김정일은 스스로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상대를 파악하여 의도적으로 다루는데 천재적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필시 그렇게 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이 정상회담이 노 대통령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김정일로서는 그 요청을 들어준 일종의 시혜라고 본다면 그런 대접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정상회담이 보통 대통령의 권력이 강한 임기 초에 있을 경우 임기 중 영향력을 고려해 후대하겠지만 퇴임 직전의 대통령을 지나치게 환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는 한국 사정을 실시간으로 손금 보듯이 알고 있는 김정일이 국내에서조차 정치적 계륵이 되어 있는 노 대통령을 대단하게 대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노 대통령과 자신을 비교해 볼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정일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격을 달리 함으로써 최소한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북한뿐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노 대통령과 같은 정상회담을 갖는다면 이와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되고 김정일을 격상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기영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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