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에 오버사이즈 안경. 인민복 차림. 키높이 구두. 김정일의 패션은 7년 전과 변한 게 없다. … 더러는 눈물까지 훔친다. 열렬한 환영을 하는 평양시민들. 그 모습에서 그러나 정겨움보다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 일사분란 함이라니, 마치 박제화된 것 같다.”
서울의 한 식당, 젊은이들이 들어선다. “대통령이 평양은 왜 간 거지.” “글쎄, 임기 말이니까 관광을 간 건가.” “아줌마, 다른 방송으로 돌려주세요!”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던 날 전해진 한국 내 보도들이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이었을까. 한 번 되뇌어 본다. 피로증세가 아닐까. 상당히 공을 들였다. 화려한 이벤트의 연속이다. 그러나 곳곳에서 노출되는 게 피로감이다. 그것도 만연한 피로증세다.
그 피로감은 먼저 한국의 보통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대통령이 38선을 걸어서 건너간다. PR의 귀재들이 상당히 고심해 만든 고도의 상징성이 깃든 초대형 이벤트다. 그런데 TV 시청률은 저조했다고 한다. 왜. 만연한 피로감이 그 답을 해주는 것 같다.
남북교류가 빈번해진다. 북한에 대한 지원이 늘어난다. 북한이라는 실체가 점차 뚜렷이 드러난다. 그럴수록 북한에 대한 피로증세는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회담을 통해 확인된 사실의 하나가 바로 이 점이다. 지긋지긋한 앵벌이에 신물이 났다. 북한 카드가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인민복 패션이다. 터번을 고집하는 회교 원리주의자를 방불케 하고 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옷차림.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뭔가를 상징하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령절대주의 체제 고수에는 변함이 없다는.
한결 초췌해졌다. 65세라면 요즘은 한창 나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피로하고 늙어 보이나.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심장병을 앓아왔다는 등의 보도가 끊이지 않았으니까.
보다 근본적 이유는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본다. 김정일은 ‘개혁·개방’이란 말에 극도로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탈북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장 반동으로 몰린다. ‘개혁·개방’은 체제 자체를 흔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한 눈에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을 알아본다. 그 반대의 논리로 왜 개혁·개방이 김정일 체제를 붕괴시키는지 북한의 고위 당국자들은 한 눈에 꿰뚫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본주의의 숨통을 트여주면 체제가 무너진다. 그 경우 북한의 지배계층은 탈출구가 없다.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이 그 다음 수순이니까. 본토의 입장에서 볼 때 자그마한 섬에 불과한 대만과 체제경쟁을 해온 중국과는 사정이 전혀 다른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평화 선언이 아니다. 대대적 남북경제 협력방안도 아니다. 바로 이 발언이다. ‘개혁·개방’이라는 용어에 김정일과 북한 고위 당국자들이 하나같이 경기(驚氣)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는 노 대통령의 개성공단 관련 발언이다.
개혁개방 없이 북한의 경제발전은 있을 수 없다. 한국과의 경제협력도 구호에 불과하다. 핵 불능화, 더나가 핵 폐기도 공수표가 될 공산이 크다. 개혁개방과 핵문제 해결, 경제위기 해소는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다.
중국이 압력을 가해온다. 미국도 그렇다. 개혁개방 압력이다. 그 개혁개방은 그런데 체제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김정일의 고민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북한 관측통들에 따르면 개성공단 하나를 유지하는 데에도 평양당국은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사상적 이완이 보통 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경애하는 지도자는 초췌한 모습으로 전 세계를 향한 카메라 앞에 섰을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서다. 말하자면 북한이 처한 내부 모순과 곤경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김정일 체제가 극도의 피로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북한은 선군(先軍)정치를 지양하고 진정한 의미의 개방체제로 나갈까. 생각만 해도 피로감이 엄습한다. 핵은 체제유지와 직결된다. 그걸 포기한다. 마치 스탈린이 어느 날 고르바초프로 변할 수 있다는 얘기와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3차 회담이다. 무대에 오른 북한 지도자는 김정일이 아니다. 달라진 게 또 있다. 북한 측 지도자의 복장이다. 인민복이 아닌, 정장의 넥타이 차림이다.
이때에나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sechok@koreatimes.com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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