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한민족포럼재단 사무국장)
뉴욕을 두고 흔히 ‘월스트릿의 탐욕’과 ‘할렘의 절망’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위엄’과 ‘타임스스퀘어의 타락’ ‘그리니치 빌리지의 자유’와 ‘5th 애비뉴의 오만한 사치’ 그리고 ‘센추럴 팍의 풍요’가 조화되지 않은 채 한데 뒤엉켜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이런 모순과 방황의 현실이 이민자들의 물결로 초현실화 된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사생아, 뉴
욕은 그래서 다양성이 함께 하는 도시다. 이제 뉴욕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개척정신으로 일군 도시가 아닌, 그들의 거울에 비친 타인의 모습, 즉 세계인이 공존하는 곳이다.
뉴욕에서 새로 인생을 배우며 생활하고 있는 나는 뉴욕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과 공존을 이 도시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덕목으로 삼고 있다. 다양성은 획일적인 것을 거부하는 자유의 개념이며, 관용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남겨주는 인간미의 여백(餘白)이기 때문이다.형형색색으로 다르게 생긴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가르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뉴욕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며 따스한 사랑의 눈길로 손을 뻗칠 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이 도시
에서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뉴욕 일원에는 다양한 가치의 문화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4년 동안의 증축을 거쳐 이태 전 다시 문을 연 뉴욕 모마(MoMA)의 건축은 ‘숭고함, 텅 빈 듯한 여백, 침묵, 고요함’이 키워드다. 여기에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마티스의 ‘춤’,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 달리의 ‘기억의 집착’ 등 고개를 돌릴 때마다 가슴이 뛰도록 근사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구겐하임, 위트니를 비롯한 각종 미술관, 링컨센터 음악관, 그리고 브로드웨이와 오프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공연관 등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 널려있는 세계적 문화예술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는 특혜를 지닌 사람들이다.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문화와 예술이 종횡하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균형감각과 성찰적 주체성을 갖지 않을 경우 자칫 막막한 미아로 그렇게 청춘을 흘려보낼 수 밖에 없다. 특히 수십만 원 하는 머리핀을 꽂고, 수십만 원 하는 백을 매고, 수백만원 하는 옷을 걸치고 명품 인생을 흉내낼 때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유명인들과 어울려 골프채를 휘두른다고 내가 유명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음악회 한 번 안 가보고, 미술전시장 한 번 둘러보지 않은 일상이라면 명품인생이 되기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품이나 최고에 대한 집착은 언뜻 보면 우월의식인 것 같지만 기실 열등감의 현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폭넓은 문화활동으로 삶의 감각을 키우고 여행과 독서로 교양과 균형있는 삶을 살 찌우고 이에 걸맞는 미적 감각과 패션에 노력을 기울여 삶을 제대로 즐길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문화는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사회를 따뜻하고 풍요롭고 여유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더우기 미주 한인사회의 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이런 문화가 뒷받침 돼야 한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와 자녀 교육에 안간힘을 쓰는 이민생활에서 ‘문화예술’이라니, 이 무슨 한가로운 사치인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숨가쁘게 거의 세븐데이 일하는 친구 “L”은 ‘인생과 예술을 완미하는 양식인’이 되기를 주장하는 나를 그렇게 나무란다.물론 문화예술이 사치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골프장이나 명품거리, 도박장에는 한인들로 북
적이는데 정작 문화예술관에는 한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개개인이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나 사치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이미지를 고양시켜 결국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종의 투자라는 인식을 확립해야 한다. 따라서 풍성한 문화행사가 치러지는 이 달 10월에는 골프장과 명품거리 보다는 문화예술의 현장에 한 번 서 보자. 다양한 종류의 문화를 즐길 때 우리는 비로소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이민살이의 허망을 딛고 일어서는 축복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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