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LA공항지점 32년 근속 - 찰스 오 부장
그가 웃는다. 그냥 입만 웃는 게 아니라 눈 꼬리까지 알뜰하게 따라 웃는 폼이, 참 보기 좋다. 나이 들면 제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절로 떠올려지는 얼굴, 더 이상 물어볼 질문도, 캐묻지 않아도 살아온 이력이 고스란히 보이는 그런 얼굴이다. 그런 웃음이다. 대한항공 미주본사 입사 32년. 한 조직에 청춘을 다 바쳤다는 식상한 말 외에도 한 아이가 나고 자라 청년이 되고 아기 아빠가 되고도 남았을 시간을 한 길만 걸어왔다. 월급쟁이들에겐 그 사실만으로도 존경스러워 보인다. 1975년 대한항공 미주 본부에 입사, 영접팀에서만 잔뼈가 굵은 찰스 오(61) 부장. 남의 나라 땅에 사는 이민자들이 다 그러하듯 공항은 우리에게 얼마나 특별한 공간이던가. 그 공간을 통해 물설고 낯 설은 타국에 이민 보따리 들고 내리기도 하고, 시간 흘러 귀국선물이라는 촌스런 이름 쟁여 넣고 큰맘 먹고 고국 나들이도 갔다. 그뿐인가. 그 공간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기도 하고, 그 공간에서 사랑하는 이를 맞기도 했다. 그런 복잡다단한 풍경을 배경으로 공항에서 울고 웃고 32년. 찰스 오 부장의 특별한 공항 인생을 들어봤다.
<올해로 대한항공 미주본부에 입사 32년이 되는 찰스 오 부장이 LA 공항 대한항공 여객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LA 한인 이민역사에 첫 관문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온 세월만큼 그의 보람의 나이테도 크다며 활짝 웃는다.>
한인 여행사서 일하다 인연맺어
갖가지 애환겪은 세월만큼 보람도
■공항 맨이 되다
가을 햇볕이 기분 좋은 지난 25일 오후, LA 공항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에서 마주 앉아 나눈 그와의 대화는 내내 유쾌했다.
1974년 간호사인 아내와 시카고로 도미, 이듬해 10월 시카코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우연찮게 파트타임을 시작한 한인 여행사에서 대한항공과 인연을 맺었다. 오며가며 대한항공을 이용하는 일본인 승객들의 통역을 도와준 게 인연이 돼 78년 10월엔 LA 미주 본부로 발령이 나 LA로 이주했다.
“지금의 LAX는 84년 LA 올림픽 때 증개축된 것이고 그때 대한항공은 천막 가건물에서 카운터 5개 놓고 업무를 보던 때였죠. 게다가 비행기로 연결되는 게이트도 없어 차를 이용, 비행기까지 사다리차를 이용했던 시절입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보람 있고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덕분에 핸디캡 승객이라도 있는 날이면 직접 승객을 업어 태우고 내리기도 수차례. 한번은 오줌 주머니를 찬 승객을 업고 사다리차를 오르다 그 비닐주머니가 터져 등을 적시기도 했다.
“그래도 일하느라, 워낙 긴장하면서 업무에 임했던 터라 나중에서야 등이 축축한 걸 알았습니다. 갈아입을 옷도 없고 워낙 바쁘기도 해 그냥 입고 하루를 버텼죠.”
승객들 관상만 봐도 문제점이 뭔지 척척
영어 불편한 노인들에 도움줄 때 가장 기뻐
‘근면 성실한 일 중독자’동료·후배들 칭송
■웃음 뒤 감춰진 애환
30년이 넘게 영접하거나 도와준 승객들의 수는 셀 수가 없을 터. 그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는 잊을 수가 없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LA 한인타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밥값을 내준 이들도 부지기 수. 다들 그때 ‘도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 그런다’며 호의를 갚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일터가 그렇듯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문제가 있거나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높은 사람 나오라고 그래’를 연발하는 이들부터, 거친 소리가 먼저 나오는 이들, 어떤 이들은 주먹다짐이 먼저 앞서기도 한다. 그래도 웃어야 하는 것이 오씨의 직업.
“후배들한테 그래요. 우리 월급 주는 사람들은 바로 고객이라고. 고객들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니 그런 불만 표출은 그냥 혼자 삭이는 거죠. 그리고 가능한 해결하는 방향으로, 웃는 낯으로 승객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영접 맨 30년, 돗자리 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돗자리 펴고 앉아도 될 듯싶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넥타이 색상과 매듭만 봐도 국적을 구분해 내고, 심지어 관상만 척 봐도 불법체류를 작정하고 온 이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다보니 게이트에서 눈빛만으로 행동만으로도 화장실을 찾는 손님인지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지 바로 알고 즉각 대응한다. 30년의 노하우만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뿐 아니다. 공항에서 귀빈을 영접하기 위해선 공항 곳곳 직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일이 잦다. 그때마다 일을 부드럽게 진행하기 위해 평소에도 공항 직원들에게 공을 들여놓는다. 직원의 커피 마시는 시간, 커피 종류까지 파악했다 적시에 커피 한 잔을 놓고 가는 것은 기본으로 대한항공 볼펜을 여러 개 안주머니에 꽂고 다니면서 필요한 이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또 좋은 일은 물론 나쁜 일에도 축하와 위로의 인사를 잊지 않는다. 이러니 그가 부탁한 청을 거절한 뱃심 좋은(?) 직원이 몇이나 있겠는가. 인사가 만사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 난리, 공항을 평정하다
동료 후배들은 평한 그를 정리하자면 ‘근면 성실한 지독한 일중독자’쯤 되겠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오 난리’일까. 소리 소문 없이 공항 곳곳을 안방처럼 뛰어다녔을 그를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마저 떠오른다.
대한항공 LA 공항지점 박형순 지점장은 “꼼꼼하고 열심히 일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이라며 “후배들
30년 넘게 일하다보니 대한항공 승무원들과도 막역한 관계가 됐다.
대한항공 김영범 수석 사무장은 “워낙 승객들에게 친절하고 적재적소의 서비스를 해 배울 점이 참 많다”며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귀신처럼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귀띔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짠’ 하고 나타나는 ‘짱가’가 따로 없다. 오 난리라는 그의 별명이 왜 붙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승객 반지 찾느라 오물통도 뒤져
■공항,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공간
<1970년 후반의 찰스 오씨. 젊고 해사한 얼굴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묻자 대답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연도별로 그의 기억창고 속에선 희비가 엇갈리는 케이스들이 줄줄이 나왔다. 왜 아니겠는가. 다른 곳도 아닌 공항인데.
그중 식은 땀나는 사례 하나. 70년대 후반쯤 한 일본 승객 한 명이 화장실을 사용하다 손에 끼고 있던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기내 변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나중에 반지를 찾을 때까지는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오씨가 고무장갑을 끼고 여객기 밑 오물통까지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승객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진땀이 나던 기억이었다고.
사례 둘. 9.11 테러 이전엔 미국 비자가 없어도 멕시코나 남미로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LA 공항에 머무를 수 있었다. 단 이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사설 경비요원들이 환승까지 동행하게 돼 있다. 그러나 70년대만 해도 작정을 하고 LA 공항에 무비자로 환승객으로 내려 도주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78년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한국인 승객 5명이 시큐리티 가드를 무차별 폭행하고 LA 공항을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사례 셋. 서울에서 노모를 모시고 있던 아들이 더 이상 모실 수 없다며 LA에 있는 딸에게 가시라며 무작정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그러니 LA 공항에 도착한 할머니는 오갈 데가 없어진 신세. 그래서 오씨가 자신의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다음날 간신히 딸과 연락이 됐지만 ‘나는 어머니 오라고 한 적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그러나 여러 번 연락 끝에 간신히 딸에게 인계가 됐다고. 현대판 고려장의 해외 버전이라 할 만하겠다.
글·사진 이주현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