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알래스카 남부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의 바다빙하 벽이 갈라지며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물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얼음의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바닷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면서 수면이 요동친다. 몇십초쯤 흘렀을까. 그 요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배까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마치 어깨를 흔들어 대며 “나 좀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침묵 속에 꼿꼿이 1만년을 서 있던 빙하는 9월 초 알래스카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 속에서 바다 로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추가치 산맥의 정상으로부터 계곡을 휘감아 바다로 흘러 내려 온 빙하들.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점차 녹아버려 정강이 부분은 흉한 뼈를 드러낸지 오래다. 빙하는 발목 부근에 흰 붕대처럼 조금 감겨 있을 뿐이다. 1시간 남짓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에 머무는 동안 바다 빙하는 4차례나 무너져 내렸다.
“관광용 빙하 재고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일행의 농담이 썰렁하기만 하다. 장관이라면 장관이랄 수 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탄성을 지를 수만 없었던 것은 바로 환경운동가 앨 고어가 말한 ‘불편한 진실’을 관념이 아닌, 현실 속에서 확인하고 있다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알래스카의 기온이 올라가면 10년 후에는 바다 빙하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기우로 들리지 않는다. 귀엽게 생긴 바다 오터들은 인간들의 고민을 아랑곳 않은 채 자맥질을 해대며 장난치기에 바쁘다.
지난 몇주 사이에 부쩍 지구 기후변화에 대한 경종과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북극의 얼음이 급속히 녹고 있다는 경고에서부터 해수면 상승으로 점차 물속에 잠기고 있는 태평양의 섬나라 투발루 주민들이 호주에 ‘기후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구 온난화 난민’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지구 온난화가 심각한 이슈로 부상하자 자기 눈으로 실태를 확인하겠다며 고액의 북극관광에 나서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는 보도이다. 북극이 관광객들로 북적이면서 이지역의 온난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물론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메탄, 아산화질소 등 온실기체들이다. 이 기체들이 태양의 복사열을 흡수해 대기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주범’으로 지목된 이산화탄소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이산화탄소는 광합성 식물의 먹이로서 결국 모든 식물의 식량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온실효과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일찌감치 얼어 죽었을 테니 인류 생존에 긍정적 역할을 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소금이 인체에 필수적이긴 해도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을 해치듯 지금 이산화탄소는 지구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환경재앙을 피해갈 수 있을까.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는 지난 1997년 맺어진 ‘교토의정서’가 잘 제시해 준다. 38개국의 이른바 잘 사는 나라들이 협약을 맺고 각국이 지난 1990년을 기준으로해서 매해 5% 정도씩 온실기체 배출을 줄여 나가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최근 온실개스 최대 배출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가 들어 있지 않은데다 기준연도인 1990년에 개스 배출량이 줄어들던 나라도 있고 급속히 늘어나던 나라도 있다. 또 의정서 준수를 감독하고 강제할 만한 기관도 없다. 명분에는 한 목소리지만 입장과 계산은 제 각각이다. 그래서 미국도 동참하지 않고 있다.
환경문제 해결은 강제성보다는 ‘양심’과 ‘양식’이 좌우하는 ‘어너 시스템’(honor system)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값이 조금 비싼 친환경 세제를 쓴다면 환경이 깨끗해 지겠지만 나 혼자만 이런 세제를 쓸 경우 환경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다는 의구심이 항상 고개를 든다.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가 작동하는 것이다. 국가와 개인 모두 마찬가지다.
환경문제 같은 공익(결국은 사익인데도 이렇게 인식한다)의 실현이 쉽지 않은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그래서 환경학자인 바비 로우와 조엘 하이넨은 “보편화 된 방만한 집단 이익에 기대하는 환경보존 철학은 개체적, 친족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이런 전망이 빗나가길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암울한 진단을 했다.
하지만 희망적인 조짐은 있다. 다양한 형태의 ‘죄수의 딜레마’를 연구한 게임이론 전문가들이 “게임은 궁극적으로 선한 시민의 승리로 끝나며 우호적 전략이 비열한 전략을 누른다”고 결론짓고 있지 않은가.
인간들은 자멸을 향해 가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이를 회피하는 현명함을 보여왔다. 환경을 바로 내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이라고 여긴다면 한층 개인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설사 손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나 먼저 친환경적인 작은 실천을 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게임이 궁극적으로는 선한 시민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확신 속에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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