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친근한 옛날이야기 ‘별주부전’에서 토끼는 재치 있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다. “워낙 간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배에서 꺼내 청산녹수 맑은 물에 씻어 감춰놓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토끼의 배를 갈라 생간을 약으로 쓰려던 용왕은 그 말을 믿고 자라 편에 토끼를 돌려보내고, 육지에 도달한 토끼는 자라를 조롱하며 숲속으로 달아난다.
몸속을, 마음속을, 삶 전체를 ‘토끼의 간’처럼 끄집어내어 깨끗한 물에 씻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다. 중년까지 우리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하듯 숨 가쁜 삶이다. 집안일, 직장일에 아이들 키우는 일만 해도 벅찬데 툭하면 터지는 이런 저런 일 뒤치다꺼리 하다 보면 차분하게 ‘나’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찾아들지 않는다.
유년시절 새하얀 옥양목처럼 싱그럽던 삶은 나이만큼씩 때타고 얼룩지고 후줄근해져서, 삶이 이불호청이라면 맑은 물에 훌훌 털어 빨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새로운 나’로 다시 시작하고 싶은 소망이다.
인간의 그런 염원이 ‘금식’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중동의 두 종교, 유태교와 이슬람교는 지금 성스러운 금식기간을 맞고 있다. 지난 13일 유태인들은 새해를, 무슬림은 9번째 달인 라마단을 맞았다.
유태인들에게 설날인 로시 하샤나부터 ‘속죄의 날’인 22일의 욤키퍼까지 열흘은 연중 가장 성스러운 절기이다. 여호와가 개개인의 지난 해 행적을 점검해 제10일에 심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행을 정결히 하다가 마지막 날인 욤키퍼에는 금식을 하며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참회의 기도에 들어간다.
라마단은 예언자 모하메드가 메카 인근의 광야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코란을 받은 일을 기념하는 달이다. 이슬람교인들은 라마단 동안 금식과 금욕생활을 하며 일상사는 접고 예배와 명상에만 집중한다.
금식 기간이라고는 하지만 해 진 후부터는 오히려 이웃, 친지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며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다가 ‘하얀 실과 검정 실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으면 다시 금식에 들어간다. 한 달의 금식을 잘 마치면 지은 죄가 깨끗이 씻어져서 처음 태어났을 때의 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다. ‘새로운 나’가 되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로서의 금식은 속죄의 의식으로 시작되었다. 히브리어에서 ‘금식’을 의미하는 단어들 중 ‘아나 네페쉬’는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는 뜻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배고픔의 고통을 벌로 가함으로써 신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는 행위이다.
종교적 ‘금식’이 영혼에 초점을 맞춘다면 세속의 ‘단식’은 몸을 대상으로 한다. 물만 마시며 음식을 차단함으로써 신체 곳곳에 쌓였던 체지방, 과잉 축적된 지방산, 숙변 등 독소를 제거해 몸 안을 대청소하는 건강법이다.
개인적으로 지난 13일부터 나는 매스터 클린스(The Master Cleanse)라는 단식을 했다. 물 대신 레몬주스와 메이플 시럽을 물에 타서 마시는 변형단식이다.
60년 전 스탠리 버로우스라는 영양학의 대가가 고안해낸 독소제거 다이어트인데 새삼스럽게 지금 미국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가수 비욘세가 영화 ‘드림걸스’ 출연을 앞두고 매스터 클린스로 20파운드를 뺀 사실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소개하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매스터 클린스의 효과로는 체중감량과 아울러 만성피로나 관절통 해소 등이 보고되고 있다.
단식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걱정이 있었다. 너무 체력이 떨어져 근무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출퇴근 운전 중 어지럽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걱정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적응기간을 거치자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기력도 팔팔해졌다. 배가 고프거나 먹고 싶어 괴로운 일도 거의 없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작은 열량으로도 정상가동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5일의 단식 후 눈에 보이는 변화는 홀쭉해진 배와 갸름해진 얼굴, 맑아진 피부. 눈에 안보이는 변화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평온한 기쁨. 몸이 순해지니 마음도 순해져서 심신이 모두 정화된 느낌이다. 존재의 ‘이불호청’을 이렇게 한번 빨고 새롭게 이 가을을 시작하고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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